운명을 믿으시나요?

운명과 의지 사이

by 콩작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분법에서 해방되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과연 운명은 있을까? 아니면 인생은 개인의 의지대로만 사는 것일까?


고3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던 때의 일이다. 나는 고3 때 방황이 왔다. 재수 없게도 시기를 잘못 탔다.


방황은 이상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닥친다. 어느 날 갑자기 무엇인가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교실에 앉아 있는데 어느 순간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들렸다.


문득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뒤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내 의지로 결정하고 살아온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채 휘청이고 살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처음으로 나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운동장을 혼자 걸으며 방황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안과 우울이 밀어닥쳤고 당연하게도 수능을 망쳤다.


그때 나는 학년 초부터 나름 우수한 성적으로 모의고사를 치렀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수능 점수가 그해에 치른 시험들 중 최하점을 기록하자 모든 관심은 뚝 끊겼다.


이후 대학을 가고 S대를 다니는 친구와 담임 선생님을 뵈러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다. 너는 아마도 7년을 공부해도 S대에 못 갔을 거라고.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원래 타고난 머리라는 것이 있고, 그래서 해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알 수 없는 굴욕감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내 인생을 걸고 7년의 시간을 수능만 준비하는데 안된다는 것인가! 점수로 줄 세우면서 3등 아래는 이름도 불러주지 않더니 역시나 꼴통 같은 선생이라고 속으로 험한 욕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시간이 지나서 분노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의문이 남았다.


'세상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란 것이 있는 걸까?"


그 뒤 나는 의문에 답할 새도 없이 바쁜 청춘의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인생을 봐 왔다.


처음부터 조건이 좋은 사람도 있었고 실제로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도 봐 왔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오지 않는 기회라는 것도 있었고, 그런 소중한 기회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쉽게 오는 것도 봤다.


그리고 마흔이 된 나는 운명과 개인의 의지, 이 둘 다를 부정하지 못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삶을 규정짓던 이분법에서 해방되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뱃머리의 방향을 정하고
마치 파도를 타듯이


삶은 원시림 같다.


자연은 분류나 경계가 없다고 했다. 최근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저)>는 책을 읽었다. 자연에는 범주화가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어류로 분류되는 생명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통칭 어류로 불리는 물속 생물들은 다양한 해부학적 특성을 가진 여러 종류로, 어류라는 하나의 최상위 생물 종류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물에 산다는 이유나 몇 가지 특징으로만 개체를 분류할 수 없다.


분류하고 범주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과 자연은 혼돈 그 자체라는 말과도 같다. 혼돈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준다. 우리가 그토록 분류하고 개념화하려는 것은 어쩌면 해석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상상을 해본다. 광대무변한 우주가 하나의 폭발로 생겨났다. 물질과 에너지는 138억 년 동안 상호 작용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수많은 우연의 사건들이 분자 수준에서, 에너지 수준에서 또는 물질 수준에서 겹쳐지고 서로 작용해 왔다. 이런 우주에서 벗어나는 개체도 없으며, 우주의 영향 밖에 있는 개체도 없다.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이다.'


인류가 발전을 거듭하며 알아가는 것은 이러한 지혜가 아닐까. 동물과 사람, 자연과 사람을 구분하던 인류가 지금은 모든 것이 복잡한 자연의 그물 안에서 함께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 동물 종이 줄어갈수록 전체 생태계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자연에서 그 역할과 쓸모가 없는 개체란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북반구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남태평양에 태풍이 불어온다는 나비 효과와 카오스 이론은 보편적인 상식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우리의 삶이 무조건적으로 내가 개척하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하는 것은 치기 어린 생각이지 않을까 싶다. 동시에, 인간의 의지가 아무 영향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나. 하다못해 감정과 생각도 자신이 선택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 하나가 뇌의 구조를 바꾸고, 호르몬을 변화시키며 신체를 변화시킨다는 연구는 줄을 잇고 있다. 만약 생각이 태도를 바꾸고 습관을 바꾼다면 당연히 운명도 바뀔 수밖에 없다. 또,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한 의지가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것을 목도한 바 있다.


삶은 이렇듯 모순과 역설이 한데 엉켜 있다. 하지만 그것 그대로 진실이다.


요사이 혼자 사색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개체로써 살아가지만 동시에 거대한 자연의 작은 일부분이다. 나의 삶도 나의 의지대로만 펼쳐질 것 같지만 이 거대한 흐름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의도와 의지는 다시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삶은 원시림 같다.


나무와 동물, 벌레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원시림처럼, 각 생명체의 살기 위한 의지는 원시림의 모양을 변화시키고 원시림은 각 생명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간다.


그 흐름 안에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만함이다. 애초에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화를 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억지를 부리면 고통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책에서 '내맡김'이란 주제로 알려주는 것 또한 이러한 사실이다.


각자의 삶은 항해하는 돛단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의 방향과 날씨의 영향, 파도의 크기를 가늠하며 그 흐름을 잘 타야 하고, 때로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허용하고 수용해야 한다. 동시에 배가 가는 방향을 지혜롭게 설정해 어디로 뱃머리를 돌릴 것인지, 어떤 항해가 되기를 바라는지 삶의 거대한 궤도를 지혜롭게 정해야 한다.






삶이 나를 통해 무엇을 펼쳐내려 하는가



다시 돌아와 운명을 생각한다.


나의 삶을 반추하면 나에게는 주어진 것과 선택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삶은 아래의 세 가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1) 타고난 성향(+재능)

2) 삶이 주는 경험들 (사건들)

3) 매 순간의 자신의 선택들


1번과 2번은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운명이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세 번째 요소 '매 순간의 자신의 선택'이 다시 1번과 2번에 영향을 준다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건들도 다시 자신이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하는 '주어진'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자신에게 온전한 배움으로 남을지 말지는 또다시 3번 자신의 선택의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세 가지 요소는 아주 복잡하게 얽혀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모르게 삶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먼저 운명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1번과 2번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이렇다.


근본적인 자신의 성향과 재능은 주어져 있다. 남들에게 쉬운 일이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고, 나에게 쉬운 일이 남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있다. 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있고, 살 수 없는 없는 환경이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곳에 가면 나는 메마르고 죽어간다.


3년 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올 때 화분 2개를 선물로 받았다. 1개는 실내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었고, 1개는 오렌지자스민이었다. 바람이 잘 불지 않고 채광이 좋지 않았던 내 방에서 오렌지자스민은 죽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햇빛과 바람을 너무도 사랑하는 식물이라고 했다. 안전하고 아늑하기만 한 내 방은 바람을 쏘이며 살아야 할 오렌지자스민에게는 맞지 않았다.


나 또한 그렇다. 내 의지로 결정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주어진 성향이라는 것이 있다. 또 내가 그 성향에 맞게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방향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주어져 있기에, 나는 운명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의문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또한 나에게는 나만의 인생 스토리가 있다. 내가 선택했던 안 했던 나는 다양한 우연과 마주쳤다.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로 선택하며 살아온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고, 때로는 고통스러웠던 일이 종국에는 내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음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삶을 살아간다고 여겼지만 삶은 나에게 경험하기를 요구하며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도 나에게 주었다. 때로는 그것이 아프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내 실수로 벌어진 일 또한 내가 경험하기를 원했다. 진실을 바로 보고 그 경험을 수용해 성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운명에 순응하는 영웅처럼 주어진 삶의 과제 앞에, 나에게 주어진 삶에 헌신하기로 했다. 나의 삶이 나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이 나의 착각이라면 삶이 나를 통해 무엇을 그려내는지 온전히 내맡겨 보기로 했다.


'발현(發現) 된다.'


한자어로 필 발(發), 나타날 현(現)이 붙은 합성어다. 사전적 의미는 속에 있거나 숨은 것이 밖으로 나타나거나 그렇게 타나 내게 한다는 뜻이다.


삶 또한 발현되기를 기도한다. 진흙 속에서 나타나는 진주처럼.


삶은 불순물을 제거해 준다. 아집, 오만함, 왜곡된 생각들, 불안, 두려움까지 삶에서 겪어내는 갖가지 사건들로 나의 삶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알게 되고. 자기 앎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아니, 불순물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어떤 부분을 따뜻함으로 녹여 다시 통합하는 과정이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기인한 삶에 대한 통제는 내려놓고, 진정 내가 가진 모습이 발현되기를, 그리고 그것 그대로 삶에서 쓰일 곳이 있다면 쓰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내 뜻은 접어두고 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수도자처럼. 진정한 내가 고요 속에서 발현되고, 삶의 흐름을 타기를 기도한다. 그렇게 조화롭게 삶과 내가 통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선한 의지는 나의 영혼이 넓어지고 깊어지는데 쓰이길 바란다. 나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삶을 항해할 것이다. 어떤 파도를 만나도 그 순간에 진실할 것이며 삶이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결단과 의지를 발휘해 본다. 그리하여 내 삶이 끝났을 때 보다 자유롭기를, 보다 열려 있기를, 보다 행복하기를. 이를 위해 삶의 무수한 우연들이 눈앞에 펼쳐지기를 고대한다. 나는 모험가이자, 삶을 그리는 작가로서 어떤 우연에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기에.


2023년 6월, 항해를 시작하는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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