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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Jun 10. 2023

잘 먹고 잘 자고 느리게 사는 하루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지혜

나는 저 사람이 참 존경스러워.
하루를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하고
돌아와서 정말 편안한 잠을 자.


미국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잠시 한국에서 온 언니의 꽃 가게 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웨딩 꽃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꽃을 꽂는 일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우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언니가 새벽 일찍 꽃 시장에 가서 꽃들을 사 오면 나는 꽃 집 양동이에 물을 담고 꽃을 종류별로 담았다. 꽃이 담긴 양동이를 냉장고에 옮겨 넣는 일이 하루의 첫 일과였다.


꽃은 대부분 버려진다. 잎사귀도 다 떼고 꽃가지도 아래를 다 자른다. 그렇게 바닥에 꽃가지와 잎사귀가 수북이 쌓이면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아 하루 몇 차례씩 내다 버렸다.


하루 종일 서서 꽃을 자르고 꽂고 쓰레기를 버리는 주중을 보내고 주말이 되면 그 꽃들을 예식장으로 옮겼다. 미국은 교외나 야외에서 장소를 빌려 결혼을 하므로 매번 1-2시간을 차로 이동을 해야 한다. 꽃은 시들기 마련이라 아침이 되면 가장 최단의 동선을 짜고, 차를 2대를 쓸지 1대로 쓸지, 인력은 얼마나 필요할지를 고민한다. 주말 아침은 007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한다.


식장에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근력 싸움이다. 물을 흠뻑 먹은 오아시스에 꽃들이 꽂혀 있어서 웨딩 꽃들은 무겁다. 그런 꽃들을 양손에 들고 계단으로 통로로 옮긴다. 꽃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집기들도 문제다. 데코레이션용 집기들을 모두 꽃집에서 준비했기 때문에 그날 쓸 모든 집기들을 옮겨야 했다. 컵, 양초, 리본부터 꽃을 놓을 단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세팅을 다 마치고 나면 드디어 결혼식이 시작된다. 우리는 그때서야 구석에 서서 쉴 수 있었고 식을 조금 보다가 밥을 먹으러 나왔다. 우리가 꽂은 꽃들은 그날 예식과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빛낼 것이다. 그렇게 자정이나 새벽 1시가 되면 다시 예식장을 찾아 세팅된 집기들을 회수해서 돌아왔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몸을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나에게는 전쟁 같은 하루가 언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하루 일과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꽃 시장을 가고 꽃을 꽂고, 퇴근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차로 태워 집으로 돌아간다. 주말에는 밤까지 일을 하고 끝나면 곤히 잠이 들었다.


처음에는 언니 혼자 꽃집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는데 어느 날 형부가 미국으로 들어왔다. 간혹 주말에 아이들을 봐주고 했던 나는 그날 형부와 고기를 구워 먹으며 맥주를 한잔 할 일이 있었다.


나에게는 그때 언니의 일상이 많은 배움을 줬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고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일과를 마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줬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나는 언니의 건강한 하루의 삶이 존경스러웠다. 그날 형부도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저 사람이 참 존경스러워. 하루를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하고 돌아와서 정말 편안한 잠을 자.”


별 말 아닌 이 말이 나는 참 인생의 비밀 열쇠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단순한 것에 진리를 담고 사는 것은 아닐지. 별생각 없이 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 순간에 언제나 집중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불만이 없었다. 언니는 매일같이 새벽 3시에는 일어났지만 그런 일에 투덜거리는 법이 없었다. 그 흔한 한숨 한번 쉰 적이 없었다.


홀로 미국에 와서 아이들과 형부를 데리고 오기까지 혼자서 자리 잡아야 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다 해야 하는지,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이뤘는지 말 한마디 없었다. 정말로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 형부가 없이 혼자 꽃 집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픽업 다니고 돌봐야 했는데 이 모든 것도 그저 묵묵히 했다. 불평불만 한 마디 없이 즐겁고 성실하게 다 해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밝고 쾌활했다.


옆에서 보기에 언니의 인생은 고된 것 같았다. 아이들을 키우고 새벽까지 일하고 그 와중에 남편도 한국에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고요한 편안함과 쾌활함이 있었다. 그 모든 일상에 불만이 없었고 불안이 없었다.


그게 나에게는 큰 자극을 줬다. 이런 인생도 있었는데 나의 삶은 너무 많은 생각이 끼어 있었다. 하루의 고된 일과가 그저 성실히 땀 흘려 사는 일과가 될 수도 있었다. 빅터 프랭클이 말한 것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며,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때 이 말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 같다.


하루에 주어진 일을 집중력 있게 성실히 하는 것. 삶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 주어진 것들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에 최선을 다해 주의를 기울여 주는 것. 어떠한 결핍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로 봐주는 것.


언니의 행복 속에는 몸으로 체득한 지혜가 있었다. 나는 그때 형부가 무엇 때문에 언니를 존경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좋은 학벌도, 좋은 직장도, 머리를 가득 채운 지식 때문도 아니었다. 언니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뿌리를 내리며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언니의 삶이 7년이 지난 지금 나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2023년 6월, 언니가 보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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