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있기 혹은 통과 하기

-강진아 감독 단편을 중심으로

by 오렌지필름


아주 오래 전에 작품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한 번 본 관객의 기억 속에서 특별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작품들은 끊임없이 호명되고 관객에게 읽을 자리를 마련한다. 강진아 감독의 단편 4편은 ‘죽음’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두고 있지만 죽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예되는 ‘생명’을 가진 작품들이다. 2000년대 초반 제작된 강진아 감독의 작품은 당시 명징하게 보여지는 ‘죽음’과 함께 특유의 미장센 중심으로 읽혀졌다. 그녀의 작품 4편 모두 ‘죽음’을 소재로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층위로 4편의 작품을 하나로 묶는 것은 다소 성급한 봉합이다. 구체적으로 <네 쌍둥이 자살>(2008), <구천리 마을잔치>(2011) 그리고 <백년해로외전>(2009), <사십구일째 날>(2010)로 나누어 그녀가 구축한 세계 속 주인공들처럼 그대로 있거나 혹은 통과하면서 강진아 감독의 단편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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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전시가 된다면


4 편의 작품은 누군가의 부재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하나의 서사적 동질성을 가진다. 다만 부재한 자-남겨진 자 사이의 사회적 거리감에 따라 작품을 다르게 연출하고 있다. 강진아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백년해로외전>, <사십구일째 날>은 가까운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네 쌍둥이 자살>, <구천리 마을잔치>는 사회적 거리감이 먼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분류된다. 나와 어떤 사회적 관계도 맺지 않은 완전한 타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미디어’라는 프레임을 통해 죽음을 바라 보게 한다. 왜 일까? 조르지오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명명한 것, ‘미디어’에서 죽음은 더 이상 생존하지 않으므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또 다시 죽일 수 있는 존재의 사례 혹은 소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미디어가 소비하는 그대로 메시지를 수용 한다. 파생 되는 이야기 역시 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막힌 공허한 이야기 일뿐, 성찰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는 없다. 따라서 나와 거리감이 먼 타인의 죽음은 미디어가 하는 그것과 동일하게 어떠한 경중도 없이 다수에게 너무 쉽게 소비된다. 또한 미디어 속에서 다루어진 사건은 사실 유무와는 상관없이 마치 정답처럼 확대-재생산 된다. 그리고 잊혀지고, 또 다시 반복된다. 강진아 감독의 단편은 이와 같은 미디어의 속성을 통해 우리에게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타인의 죽음을 하나의 소재로 쉽게 소비해도 되는 것인가?


<네 쌍둥이 자살>은 옥상에서 여고생 4명이 합창대회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반대편 옥상에서 괴성이 연이어 들린다. 알고 보니 4명의 쌍둥이가 자살을 한 것이다. 소비하기 좋은 하나의 이벤트를 TV프로그램이 놓칠 리 없다. 작품 속에서《CBS 이종필의 다시 보는 뉴스현장》이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해 네 쌍둥이의 ‘죽음’을 전시하기 시작한다. 방송은 “왜 네 쌍둥이가 자살을 했는지?”에 방점을 두고 네 쌍둥이의 지인들을 찾아간다. 동사무소 주민, 여자친구, 병원의사 등을 만나며 필요 소재로 그들의 말을 모으기 시작한다. 방송은 하나의 사회적 사건으로 죽음을 바라보게 만들고 마치 그들에게 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는 마땅한 의무가 있게 만든다. 이것은 발터 벤야민이 경계하는 ‘신화적 폭력’이다. ‘신화적 폭력’은 수단을 목적에, 원인을 결과에 연결시키는 폭력이다. 그것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 한다. 미디어라는 매체에서 던진 관음증적 질문을 받은 주체는 방송의 소재로, 수단의 자리로 쉽게 이동하고 말 뿐이다. 미디어라는 ‘무대’에서 타인의 죽음에 대한 대답을 연기한 4명의 여고생은 공연장이라는 ‘무대’에 올라가 합창을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4명의 여고생이 합창을 할 때 관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보여지는 것’만 끊임없이 생산하면 될 뿐, 보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TV프로그램, 합창대회로 묘하게 이어지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를 포착한 감독은 엔딩 시퀀스에서 오프닝 시퀀스에서 ‘순간’으로 표현 되었던 네 쌍둥이의 죽음을 아주 ‘천천히’ 보여준다. 감독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다. 타인의 죽음은 자극적인 ‘순간’으로 치환 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천천히 바라보고 슬퍼해야 하는 일인가?


<구천리 마을잔치>역시 TV프로그램은 수단과 목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용해 구천리 마을 사람들을 손쉽게 포획하는 데 성공한다. 구천리 마을사람들은《KBC 길 따라 맛 따라》에서 호명한 그대로 파프리카라는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는 연기자가 된다. 방송을 통해 창출될 마을 전체의 욕망이라는 거대한 목적 앞에 ‘신애의 시체’가 던지는 성찰적 질문은 ‘신애의 시체’와 함께 묻어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뿐이다. 마치 미디어 속 세계가 그렇듯, 구천리 마을에서 ‘신애의 시체’는 땅 속으로 묻히며 보기 좋게 편집되는 듯 보인다. 이때, 감독은 갑자기 신애로 추정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디어라는 세계에서 호명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현실에서 편집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질문하는 장면이다. 마을 사람들이 묻은 것은 신애에게 투사한 그들의 자신의 욕망, 질투, 폭력, 이상함이라는 감정의 파편이 전부이다. 신애의 시체 역시 ‘일부’만 존재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읽힌다. 감독은 그렇기에 신애 이거나-혹은 신애가 아닌 여인들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 여인, 신애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애를 보았으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질문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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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질문들


우리는 기본적인 논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앞에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을 언어로 정리하고 이해하고자 노력을 하는 것이다. 물론 ‘죽음’이라는 명제는 라캉이 말한 대로 불가해한 세계이기에 무수한 질문들만 연쇄적으로 이어질 뿐이다. 강진아 감독의 두 편 <사십구일 째 날>, <백년해로 외전>은 나와 가까운 타인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다. <사십구일 째 날>은 엄마의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백년해로 외전>은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남겨진 남자친구의 이야기이다. 위에 언급한 상대적으로 사회적 거리가 먼 타인의 죽음을 이야기 할 때 ‘미디어’라는 매체를 가져와 이야기 했다면, 가까운 타인의 부재에서 감독은 ‘환상’이라는 영화적 장치를 이용한다. 동시에 <백년해로 외전>은 ‘인터뷰’라는 형식을 빌리기에 앞의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를 활용한 두 작품과 다음 작품을 잇는 매개가 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사십구일 째 날>, <백년해로 외전>에서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 타자의 자리를 인식한 후에 자신에게 다시 질문하는 의문문이다. 타인을 향해 질문하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 답하는 혼잣말인 것이다. 불가해한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십구일 째 날>은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 차경, 주경의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차경(한예리 분)은 아빠가 엄마의 49제를 멋대로 진행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니 주경(김해진 분)은 아빠의 말에 순응하고, 집으로 돌아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감정만을 생각하는 동생에게 훈수를 둔다. 그렇게 시작된 말다툼이 커지는 순간, ‘환상’이 등장한다. 여기서 환상이 불러오는 세계는 선형적인 시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가까운 타인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 찾아오는 순간 역시 비선형적이듯 말이다. ‘환상’은 차경, 주경 두 자매가 함께 존재 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간다. 환상 속에서도 여전히 둘은 다 자란 성인의 모습이지만, 어쩐지 엄마는 ‘손바닥’을 맞아도 되는 어린 모습으로 둘을 대한다. 이는 엄마라는 존재 앞에서 자식은 어린 존재로 자리하는 것을 형상화 하는 동시에 엄마의 죽음 앞에서는 아직 혼자 설 수 없는 무력한 어린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기억은 의식적으로 미뤄왔던 좋은 아빠의 모습까지 수면 위로 등장하게 한다. 거부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곧장 차경은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됐고, 현실을 확인한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감정을 토로한다. 차경은 환상이라는 세계에서도 엄마만 불러 세울 수 없는 게 속상한 것이다. 사람마다 기억이 다르듯 차경에게 엄마는 시각으로 존재한다면, 주경에게는 청각으로 존재한다. 주경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무너진다. 부재한 사람이 떠오르는 장소에 자신의 몸을 데려가면, 그 공간만큼이나 텅 빈 마음의 자리를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경은 그 자리에서 엄마의 말과 노래가 들린다. 그렇게 딸 둘이 환상을 오가는 와중에 아빠는 엄마의 옷을 태우러 갔다. 그렇게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남겨진 가족은 엄마를 애도하고 있다.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로, 목소리로 불가해한 죽음을 환상이라는 언어로 마주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수용의 태도는 프로이트가 정의하는 애도의 행위로 읽힌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애도란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 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난다고 정의하고 있다. 애도는 이처럼 과정상에 분명한 내러티브를 가지는 것이고 작품에서 내러티브는 ‘환상’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우울증은 정의를 달리한다.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상실로 이어진다. <백년해로 외전>의 혁근은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르는 우울증과 같은 증세를 보이다 차츰 애도로 과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차경(한예리 분)은 남자친구인 혁근(이종필 분)과 통화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자전거 사고를 당한다. 여기서 혁근은 차경이 사고를 당한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급격한 자기 비하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재촉해서, 혹은 자신과의 통화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향해 계속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환상’이라는 장치가 나온다. <사십 구일 째 날>과 동일하게 혁근 역시 환상 속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를 테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차경과 혁근은 바다로 여행을 간다. 갑자기 즐겁게 놀다가, 차경은 줄 지어진 사람(= 죽음)들 쪽으로 달려가 버린다. 혁근은 현실이라는 모래에 묶여버린 채로 혼자 남겨져 있다. 그 순간 혁근 역시 <사십 구일 째 날>과 동일하게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차경은 앞서 말한 ‘인터뷰’, 넓게는 ‘미디어’의 형식으로 자신의 기억들을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가장 최근 기억 순으로 이어지고 내용과 순서는 모두 흥미로운 지점으로 읽힌다. 차경이 살면서 가장 가깝다고 느꼈을 가족, 언니, 혁근에 대한 기억들에 이어 차경의 입으로 절대 들을 수 없었던 사고에 대해 스스로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경의 인터뷰 형식으로 나열되는 ‘환상’은 차경이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떠났을 것이라는 혁근의 바람인 동시에 혁근이 애도의 과정으로 진입 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 한다. 가장 상징적으로 애도의 과정으로 진입 했음이 드러나는 차경의 이야기는 ‘목련’에 관한 기억이다. 차경은 한 번 난 상처를 평생 품고 사는 목련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 일부러 꺾어버렸다고 한다. 이는 혁근이 차경이 해준 이야기 중에서 현재 자신의 고통을 승화할 수 있는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이처럼 차경이라는 대상과 동일시해서 자기 상실로 이어지는 우울증이 아닌, 대상을 바라보고 직면하게 된 애도의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차경의 인터뷰라는 ‘환상’의 형식 외에도 혁근은 차경이라는 대상을 직접 불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혁근은 매우 치열하고 직접적으로 애도의 과정을 겪고 있음을 감독은 ‘환상’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보여준다. 마지막에 사고 현장을 찾은 혁근은 그 자리에 자신이 누워보고, 환상 속에서 차경을 마주한다. 혁근에게 피로 뒤덮인 차경은 없는 신발을 자신의 것으로 주고, 가방으로 베개를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고로 죽을 당시에 혼자 무섭진 않았는지 자꾸 물어 보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차경은 그런 혁근에게 고맙고, 괜찮다고 답한다. 그렇게 환상의 서사는 마무리된다. 한편 이 작품에서 현실 속에서 혁근이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혁근에게 던진다. 사랑하는 존재를 갑자기 상실한 사람의 아픔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괜찮을 수 없는 상대에게 계속해서 괜찮음을 묻는 것이다. 혁근은 현실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하루 빨리 괜찮아져야 할 것을 강요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질문들의 거리감만큼 현실에서 멀어져 혼자가 되길 반복 하게 되는 것 같아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끝까지 혁근을 연민의 대상으로 전시화 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천천히 현실로 나아가고 있는 혁근의 모습과 언젠가는 지워질 차경의 사고 현장을 나란히 보여주며 혁근을 위로하는 동시에 차경을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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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야기들


강진아 감독의 단편 4편을 ‘죽음’과 ‘미장센’이라는 한 문장이 아닌 긴 이야기로 옮겨보았다. 남겨진 존재들과 부재한 존재의 사회적 거리감을 기준으로 ‘미디어’, ‘환상’이라는 수사적 장치를 통해 애도에 대한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단편 4편을 묶기 보다는 작품 별로 더 많은 주석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강진아 감독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미시적 사건을 통한 사회 구조의 본질, 알레고리를 묻는 그녀만의 방식은 대체 불가능하다. <네 쌍둥이 자살>(2008), <구천리 마을잔치>(2011)는 ‘미디어’의 시선을 향한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백년해로 외전>(2009), <사십구일째 날>(2010)의 남겨진 사람들의 ‘환상’을 통해 우리는 애도를 향한 태도를 성찰해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넘치는 생명력으로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강진아 감독의 작품 4편<네 쌍둥이 자살>(2008), <백년해로외전>(2009), <사십구일째 날>(2010), <구천리 마을잔치>(2011)속 인물들처럼 그대로 있거나 혹은 통과하면서 더 짙어졌을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어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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