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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Oct 24. 2021

남은 자들

눈물이었구나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 무언가에 이끌려 밖으로 뛰쳐나온다. 산 정상을 탈환한 듯 밀린 숨을 몰아쉰다. 바람 빠진 자전거 바퀴에 공기를 펌프 하듯 구석구석 말라버린 뇌 속에 산소를 주입한다. 숨이 쉬어진다. 

저기 하늘을 향해 삐죽이 솟은 파란 조형물이 하얀 눈 속에 빛난다.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서


한 점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며 길쭉하게 이어진 곡선이 미끄러지듯 잘 빠졌다. 대형 병원 한가운데 버젓이 서있는 걸 보면 유명 작가의 작품이겠다. "이 작품이 뭐를 형상화했는지 알아?" 갑자기 뛰어나온 정희가 걱정돼 뒤따라 나온 남편은 조심스레 정희의 얼굴을 살피며 묻는다.

부분으로 보였던 파란 조각상을 다시 한번 크게 바라본다.


"글쎄, 뭔데?"


"음……. 제목은 시간의 방향이고 눈물을 형상화했대. 장례식장에 어울리는 작품이지." 


‘아, 눈물이었구나. 눈물’   



1층 아파트에 전세를 얻고 방 한 칸에 6인용 책상을 들여 공부방을 꾸몄다. 정희의 일터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 내내 동네 꼬마 녀석들의 사랑방이 된 이곳의 문을 몇 해 만에 처음 닫았다. 

서울 구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나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딸이 사는 용인 구성까지 2시간이 넘게 걸린다. 거리와 상관없이 자식이 불편할까 염려되어 자주 들르지 못하셨을 거다. 정희 또한 아이 둘을 데리고 왕복 4시간 걸리는 친정에 자주 들르는 것이 부담이었고 무심하고 이기적인 성격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쉬기로 계획한 방학, 친정 엄마의 심상치 않은 몸상태는 며느리이자 딸인 내게 합당한 이유를 부여했다. 부모가 위독하다는 데 가지 말라고 할 시댁 어른은 아니었다. 친정으로 가던 길, 분당의 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무늬, 나이 든 여자라면 결국 열광하게 되는 문양을 찾아 갔다. 60대 이상 여자의 다수는 자석처럼 꽃무늬에 끌린다. 잔꽃이건 큼지막한 꽃이건 꽃을 몸에 둘러야 마음도 화사해지나 보다. 한두 가지로 심플한 꽃이기도 하고 알록달록 오색 꽃이기도 한 꽃밭 속에 파묻혀 있어야 힘을 얻는 엄마가 떠올랐다.

     

1층 잡화코너에 들어서자마자 꽃무의 가방이 눈에 띄었다. 겨울에 맞는 차분한 꽃들이 그려진 천가방이었다. 가볍다. 낙하산 재료로 쓰이는 특수재질이란다. 힘이 없는 엄마가 오래오래 들어주기를 바라며 가장 화려한 꽃이 피어있는 가방을 샀다. 친정 집에 도착해 가방을 보여드렸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엄마의 얼굴이 잠시 환해졌다. 


"꽃가라구나."


"맞아. 엄마가 좋아하는 꽃가라." 


"내일 병원 갈 때 들고 가라고."


"가볍고 좋다."


엄마는 목욕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평생 쓸고 닦고 씻으며, 무언가를 깨끗이 하는데 평생을 받쳐온 사람이다. 정갈하게 각을 맞추고 반듯이 오와 열로 줄을 세워놓고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헹구고 무엇이든 사람의 얼굴이 비칠 때까지 반짝이게 닦아야 마음이 편한 그런 사람이다. 


언니와 정희는 엄마를 부축해 욕실로 갔다. 엄마의 몸이 이렇게 가차 없이 무너진 사실을 몰랐다. 욕실의자에 앉기도 힘들어했다. 몇 알 남지 않은 쌀자루처럼 몸이 좌우로 휘청였다. 옆에서 붙잡아도 그 사이로 자꾸 녹아 흘렀다. 따뜻한 물로 얼굴을 닦아주면 정희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벼댔다. 그건 머리가 움직인 게 아니라 정희의 손 위로 머리가 무너진 거였다. 


다음날 병원에 갔다. 담당 의사는 남은 시간을 2주 정도로 예상했다. 엄마는 입원을 했고 진통제를 투여받았다. 언니 정숙과 아빠는 교대로 엄마를 간호했고 정희는 집에 있는 아이들 걱정에 낮시간 동안 엄마에게 다녀갔다. 병실에 들를 때마다 엄마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어쩌다 깨어나면 끔찍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져 신음했다. 언니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다 주고 돌아왔다. 정희는 잘 모른다. 엄마의 끊어져가는 목숨이 가하는 엄청난 고통을, 이를 지켜보는 언니가 겪었을 내장이 녹아내리는 아픔을.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12시,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가 떠났다. 자식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심장을 부여잡고 살아야 했던 62년의 삶을 거두었다.  




누가 보면 지역 유지가 돌아가신 줄 알겠다. 신세 졌다는 사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그 흔한 학교 이름, 회사 이름 박힌 영혼 없는 조화 하나 없지만, 엄마 때문에 배우자의 폭력을 피하고, 일자리를 얻고, 자식 등록금을 변통하고, 주린 배를 채웠다는 수많은 수혜자들의 애통함이 끊이지 않았다.  

     

시골 삼촌들과 이모들은 돌아가시기 전, 당신의 자식들에게 말했단다. 더 이상 시골에서는 먹고살기 힘드니 서울 가서 막내 이모, 즉 정희의 엄마를 찾으라고 했다. 그 이모라면 너희를 거두어줄 거라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모질지 못했던 아빠는 엄마가 주변 사람들을 거두는 데 별말씀이 없으셨다. 엄마는 오랫동안 홀로 된 고모도 큰 아버지의 자식들도 다 씻기고 입혀가며 돌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집에 다섯여섯 되는 사촌 오빠, 사촌 언니들이 하나둘씩 서울 막내 이모를 찾아왔다. 하나를 먹이고 입혀 시집보내고 취직시키면 그 동생이 또 그 동생이 이모 집 문을 두드렸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엄마는 큰 이모 손에 자랐고, 엄마가 서울로 시집올 때는 큰 이모부가 마당에 널어 논 고추를 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시집을 보내줬다고 어린 내게 천만 번을 말했다. 큰 이모부가 엄마에게 이불 한 채를 해줘서 시집올 수 있었다고. 또 큰 이모부는 몸이 약하고 입이 짧은 막내 처제에게만 몰래 삶은 계란을 쥐어줬다고. 엄마는 이모부의 은혜를 갚아야 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았다.

     

오늘도 장례식장에는 사촌 언니와 오빠들이 진을 치고 앉아 나보다 더 비통한 표정으로 엄마를 추억한다. 


"정희야. 너 왜 화장 안 하니?"


"어, 해야 되나?"


"그럼 해야지. (아들도 없는데 산소를 어찌 관리하려고)"


상주 대기실로 들어가 거울 속 얼굴을 본다. 초췌하다 못해 몰골이 추레하다. 가방 속 파우치에서 분과 립스틱을 꺼내 정성껏 예를 갖춘다. 대기실을 나오는데 사촌 언니들의 큭큭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너 화장했어?"


"화장하라며"


‘울 엄마는 이런 나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모지리 나를 두고’ 정희는 눈을 감는다.  

   



밤나무 우거진 동그란 산 한켠, 30여 개의 묘지가 모여 있다. 예로부터 장 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단지 아파트가 밀집된 개발도시가 되었다. 그곳에 남아있던 장 씨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묘지 터를 장만했고 정희 아버지도 몇 개의 자리를 선점했다. 반 푼이 배산임수라 뒤는 산이 맞는데 앞은 물이 아니라 아파트다. 오르내릴 때마다 괜스레 아파트 주민들에게 미안해진다. ‘한쪽 뷰가 공동묘지라니. 여기에 입주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거래가가 다른 곳보다 훨씬 저렴하면 자금이 부족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도 있겠지’라는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었다. 유족들이 하루 종일 고인을 위로하는 건 아니었다.      


완만한 경사의 산 중턱, 한겨울에도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지게 하는 따뜻한 햇볕이 머무는 곳에 엄마가 있다. 어른들은 양지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잡초가 잘 자라고 산소의 떼가 쉬이 마른다고 했다. 할머니 묘는 뒤에 밤나무가 제법 있어 그늘이 되어주는데 엄마 묘소는 두 칸 아래로 하늘이 사방 터져서 소철 잔가지만 한 그늘 한 점 없다. 또 어떤 이들은 산소는 무조건 양지바른 곳이 최고의 명당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의견을 종합해보면 엄마의 묘 자리는 그냥 보통은 되는 곳이라는 결론이다.

 ‘인간이 죽어 묻히는 산소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화장해서 한 줌 가루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고 정희는 구시렁거린다. 아버지의 원대로 선산에 묻힌 엄마, 다음 기일에는 선글라스라도 씌어드릴까, 강렬한 햇살이 거슬린다.      


엄마를 이고 산에 오르던 날, 붉은 땅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낮의 해를 받아 녹고 있었다. 질척대는 땅에 상여를 맨 남자들의 발이 자꾸 빠져 야트막한 산임에도 쩔쩔매며 힘들게 올라갔다. 망자의 일대기를 어쨌든 위대한 신앙인의 순교로 엮고 싶은 목사님의 지리한 입관 예배를 마치고 산을 내려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났다. 그곳까지 와주신 조문객들을 모시고 근처에 있는 해장국집으로 갔다. 모두들 정희의 손을 부여잡고 잘 먹고 힘내야 한다며 당신들의 해장국을 밀어주었다. 상주로써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유지했다. 부지런히 어른들의 식사를 챙겨드리고 감사의 말을 거듭 전하며 끝자리에 앉았다.  

    

뚝배기에 담겨 보글보글 끓고 있는 해장국은 선지도 양도 잔뜩 들어 있다. 얼어붙은 몸이 스르르 녹았다. 밍밍한 장례식장 음식이 아닌 조미료가 적당히 가미된 붉은 해장국이 은밀한 정희의 허기를 툭하고 건드렸다. 그 순간 실종되었던 입맛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내게 측은한 눈빛을 보내고 등을 토닥이는데, 엄마를 묻고 내려와 먹는 해장국이 이렇게나 맛있다니,’ 가슴속엔 슬픔이 끓고 정희의 입에는 침샘이 들끓었다.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는 불멸의 불사조처럼 집요하게 살아있는 입맛이 끔찍했다.     



일 년이 지났다. 붉은 흙으로 덮여있던 산소는 제법 떼가 고르게 입혀졌고 그 앞에는 알록달록 촌스러운  조화 한 다발이 꽃병에 꽂혀있다. 


“누가 다녀갔나 봐. 꽃을 놓고 갔네.” 


“아니다, 그저께 산소 정리 좀 하려고 왔었다. 생화는 시들면 지저분하니까 이걸로 사다 놨는데, 엄마가 좋아하는 꽃 맞지?”라고 말씀하시는 아빠의 얼굴이 꽃처럼 붉다. 


“네, 맞아요. 예뻐요.”


며칠 후면 다시 올 이곳에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오시는 아빠. 벌초를 하고 꽃을 장식하고 그리고 두 분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았나 보다. 아빠는 50년 전 수줍은 영숙 씨를 만났을까. 병실에 누워 호로록 날아가 버릴 것 같이 앙상한 정희 엄마를 만났을까.      


자식들이 무덤 앞에서 묵념을 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은 꽤나 정치적이고 형식적인 제스처다. 선거를 앞두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그들의 손을 잡고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 잠시 기도든 묵념이든 해야 할 일을 마치면 어느새 돌아갈 고속도로 최단시간과 경로를 검색하고 각자의 차에 올라탄다. 산소에 도착해 엄마를 만나고 돌아갈 차에 올라타기까지 총 소요 시간은 30분 이내다.     


정희의 차가 산소가 있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 멀리 한 점이 된 엄마가 보인다.


‘다시 올게. 혼자. 그때는 내리쬐는 햇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누워 뒹굴래. 시시콜콜 밀린 수다를 떨고 한바탕 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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