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진 Oct 04. 2021

마지막 미니스커트를 입다

가르치고 배우는 즐거움

1986년 아시안 게임 개막식 요원으로 참가했다.

그때 입은 미니스커트 모양의 하얀 무용복은 추억이자 소소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오동통하고 실한 다리를 롱스커트나 바지로 가려고 다녔다. 물론 결혼식 예복은 활동성을 추구한다는 명목 아래 바지 정장의 슈트를 선택했다. 오늘은 아시안 게임에서의 추억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지금 같으면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몇 달씩 단체 매스게임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때는 다들 나라의 큰 행사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이었는지 나랏일에 대한 너 나 없는 협동심 때문인지 별 불평 없이 매스게임 행사에 동원되었다. 체육시간만 활용한 건 아니었다. 점심시간 이후 줄곧  강당이나 운동장에 모여 연습을 했고 개막식이 다가와서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맞춰보기 위해 넓은 효창운동장에서 연습을 했다. 


매스게임을 마치면 소보로빵 흰 우유를 받아먹었다. 다니던 여학교의 체육 선생님이 유명한 전직 국가대표 리듬 선수였고 우리 학교에는 리듬체조 특별반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내 모교도 동원된 것 같다. 공부에 그닥 뜨거운 열의가 없던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무용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왼쪽 오른쪽 방향감각이 떨어져 체육시간이 공포스러웠었다. '좌향 좌해서 두 발짝 여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한 발짝', 이런 게 너무 어려웠다. '뒤돌아서 오른쪽으로' 이런 것도 어려웠다. 제자리에서가 아닌 이동 후 방향 바꾸기는 엉키기 십상이었다. 


엄마는 내 운동화 등짝에 "우"였는지 "오"였는지를 써주셨다. 우향우 또는 오른쪽이라는 표시다. 나는 체육 선생님이 마이크로 우향우, 좌향좌를 외치면 신발을 보고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행히 점점 나아져 신발을 보지 않고도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됐다. 고등학교 때는 정신줄을 놓지 않는 이상 별 실수를 하지 않았다.


세종대 무용과 언니들도 참여했는데 당시 미스코리아 진이 그 학교 출신이어서 몰려가 신기하게 구경을 했고 tv로 봤던 육상 선수 장재근 선수를 성화 주자로 가까이서 봤다.


기록을 풀버전으로 찾고 싶은데 그때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편집본 한 개를 겨우 찾았는데 전체 개막식을 담다 보니 내가 찾고 싶은 장면 하고는 좀 다르다. 나는 SEOUL의 한 글자를  만든 것 같은데 비디오에는 불꽃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글자를 만들고 나서 마지막으로 불꽃을 만든 것 같다. SEOUL의 E자 마지막 획순 언저리에 내가 서있었던 것 같다.


출처- 나무 위키


친구들과 순서를 기다리며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돌아다녔다. 모두들 한복을 칭칭 둘러 입고 더워했는데 우리들은 산들거리는 무용복을 입고 있어 무척 부러워했다. 그 눈길을 받으며 친구들과 쏘다녔다. 입시의 압박이 덜 했던 때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으로 배움을 마친 친구들도 있어 추억을 쌓는 일에 열정적이었던 것 같다.


출처- 나무 위키


돌이켜보면 저마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그것을 대학 입학과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행히 음악 선생님은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말썽만 피우는 한 친구의 목소리를 높이 평가하시고 음악적 재능을 키워주셨다. 그 친구는 더 이상 교실 맨 뒷자리에서 하루 종일 잠만 자지 않았다. 합창대회에서 우리 반을 이끄는 카리스마 있는 지휘자가 되었다.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감춰진 재능을 발견하시고 무대에 세워주신 선생님이 계셔서 그 친구는 성악으로 꽃을 피웠다. 


음악시간에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제목을 알아맞히는 시험을 봤다. 귀찮게 이런 시험을 본다고 불평을 했었는데 지금도 길을 가다, 라디오를 듣다 선생님이 들려주신 음악이 나오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제목은 떠오르지 않아도 익숙하다. 그 익숙함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반강제로 들려주신 그 음악이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를 투덜거리며 듣고 외웠다. '스메타나, 무슨 약 이름 아니야. 연고 이름, 왜 이렇게 복잡해. 음악은 좋지만.....'라고 투정 거리면서도 테이프 앞뒤를 돌려가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 jensth, 출처 Unsplash


이렇듯 무용, 음악, 미술, 독서가 함께 했던 학창 시절이었다. 풍성한 문화가 있던 그 시간이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마음의 여유를 누리고 최소한의 교양을 채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부족해도 학교가 아닐까 싶다. 선생님이자 인생의 선배님들은 좋은 것을 알려주는데 열정적이었고 학생들은 병아리처럼 그것을 받아먹던 때가 바로 인생의 황금기였다. 


스스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나이가 되면 우리의 생존 욕구와 안정을 향한 욕구는 주변의 다른 것을 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지금의 10대들이 그렇지 않을까. 치열한 입시와 낮은 취업률 등으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듯싶다. 안타깝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것일 수 있고 쓸데없는 것이 쓸데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걸, 무의미해 보이는 아까운 시간들이 훗날 괜찮은 경험이었음을 나 또한 뒤늦게 깨닫는다.


오래된 빛바랜 화면 속 학생들의 얼굴이  밝다. 

선생님이 웃으라고 시키셨으려나,  


밝게 웃는 모습이 눈부시다.




작가의 이전글 가을연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