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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Oct 24. 2021

하나뿐인 우산이었어

사랑한다면 이렇게

박하사탕을 머금은 듯 청량한 가을 어느 날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학부모 여럿이 아이들을 데리고 모였다. 대부분 같은 아파트이거나 이웃 아파트에 사는 둘째 아이의 친구들과 그들의 엄마이다. 각 집의 하나 혹은 둘의 아이를 태우고 집에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물원으로 갔다.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의 조잘거림을 배경음악 삼아 신나게 출발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들은 연약해서 쉽게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 부족하고 덜 여문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고 생각한 엄마들의 마음은 한없이 약했고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활짝 열렸으며 동족상잔의 위로를 받고 싶어 했다. 특히 늦되고 모자란 사내아이들의 엄마는 똘똘해서 큰 누나 같은 여학생들의 엄마와 사귀고 싶었다. 여자아이들은 아들이 전해주지 못하는 생생한 정보와 전달사항을 9시 뉴스 앵커가 되어 또박또박 알려줬다.


© LadyBB, 출처 Pixabay


누가 선생님께 왜 혼났는지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었고, 남자아이들이 어리버리 결론을 맺지 못하는 숙제 내용도 야무진 여자아이는 선생님의 속내까지 알아채고 표정까지 그대로 재연해가며 전달하곤 했다. 아들 엄마들은 번역기로도 해독되지 않는 아들의 알림장을 보다가 속이 터져 딸을 가진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그럼 십중팔구 "아, 그런 거구나." 하고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들의 모임은 훗날 가장 오래 지속될 정도로 끈끈한 친목으로 뭉친다. 이사를 여러 차례 다닌 지금도 그 모임은 허물없이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아이들은 진로나 다른 성장과정을 거치며 서먹서먹해지는데 엄마들만은 여전히 하나로 그 자리에 있다. 입시철에나 조금 예민했을까,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의 순수한 초등 1학년 엄마들로 돌아간다. "다 소용없어, 다 필요 없어. 자식들한테 미련 갖지 마. 우리 인생 살자." 하며 으쌰 으쌰 하게 된다.


하늘이 맑던 그날도 우리의 웃음과 수다는 산처럼 쌓여 줄지 않았고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체험 활동을 했다. 양들에게 풀을 먹이고 말을 타고 홍학 앞에서 사진을 찍고.....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 maguay, 출처 Unsplash


매년 한두 차례 남산으로 새절로, 서오릉으로 수없이 다닌 학창 시절의 소풍을 징검다리 건너듯 훌쩍 뛰어넘고, 엄마가 되어 이웃 엄마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  동물원 나들이를 떠올린 건 그날의 평생 잊지 못할 따듯한 선물 때문이다.


동물원 체험이 끝날 즈음 갑자기 하늘에서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를 확인하고 계획한 소풍이었는데 하늘이 얄궂게 변덕을 부렸다. 우산도 없는데 난감했다. 근처에 우산을 살 수 있는 편의점이나 마트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정신없이 활동을 마무리하고 멀리 떨어진 주차장을 향해 뛰었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아이에게 씌워주는데 준영 엄마가 다가왔다.

"이거 승민이 씌워." 하며 내 귀에 속삭였다.

얼른 뒤를 돌아봤다. 

준영 엄마는 내게 우산을 받으라며 쿡쿡 찔러주었다. 

분명 우산은 하나였다. 

"승민이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우리 애들은 괜찮아."


몸이 약한 둘째 아들 승민이에게 준영 엄마는 하나뿐인 우산을 양보해 주었다. 준영이와 준하는 가방을 머리에 쓰고 뛰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가족 같은 마음

내 자식, 네 자식 없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코끝이 매웠다.


준영이 엄마를 생각하면 잊히지 않는 또 하나의 감사가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 1, 2학년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벤트가 아닌가 싶은 '아이들의 생일 초대'이다. 벽 한 면은 Happy Birthday로 장식하고 천장엔 풍선 몇 개를 띄우고 피자, 떡볶이 등을 준비한다. 친구들이 생일선물을 나눠주며 그날이 생일인 주인공을 기쁘게 해주는 생일파티가 심심치 않게 열렸다. 

© janepatriciagraystone, 출처 Unsplash

준영이의 생일이었다. 1부로 집에서 생일 축하를 마치면 아이들은 놀이터로 나가 마음껏 뛰어놀았다. 그 시간 집에서는  엄마들의 수다파티가 벌어진다. 그러다 아이들이 땀을 흘리고 목이 탈 즈음이면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나눠주며 열기를 식힌다. 


나는 아토피로 아이스크림을 못 먹는 승민이를 위해 물병에 주스나 물을 들고 다녔고 승민이는 아이들이 먹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봐야만 했다. 다른 간식을 챙겨주며 상황을 무마해 보지만 아이의 눈은 이미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에 가있다. 준영 엄마는 초대한 아이들의 아이스크림을 준비하며 승민이 것도 준비했다고 한다. 무얼까.


다 먹고 난 쭈쭈바 비닐을 깨끗이 씻어 말린 후 그 속에 매실주스를 넣어 꽁꽁 얼려 만든 매실 쭈쭈바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한 게 분명했다.

승민이는 놀이터에 걸 터 앉아 다른 아이들과 쭈쭈바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또 케이크를 못 먹는 승민이를 위해 별도로 미니 하트 백설기를 준비한 마음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 동네를 떠나며 많이 울었다. 남편이 직장에서 자리 잡기 전 마음고생도 시부모님과 살면서 겪은 가슴앓이도 급식이 맞지 않은 둘째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일상 속에서도 주변의 이웃들은 따뜻한 위로자였고 평생 고마움을 갚고 싶은 친구가 돼주었다.


이름만큼이나 지혜로운 나의 친구 지혜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땡큐 지혜, 마이 프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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