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때)
준비물: 2,000원 또는 25,000원 정도 현금
활을 만들어본다고?
황학정을 알게 된 건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였다. 그동안 서울에 가볼만한 곳에 관해서 책을 꽤 본 편이었는데도 황학정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행사를 찾으러 들어갔던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건 두둥...... 황학정 국궁전시관에서 활 만들기 체험이 있다는 공지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간이 직접 만든 도구와 창, 칼같은 무기들을 본 후라 그런지 나도 활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종로문화재단에서 가능한 날짜를 선택해 체험 신청을 했다.
*활 만들기 체험비는 25,000원.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원하는 시간대를 골라 체험을 신청할 수 있다. 활쏘기 체험은 단체만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국궁전시관에 직접 전화해서 예약하는 것도 가능. 관람시간은 오후 5시까지인데, 체험하려면 4시까지는 입장해야 한다고 한다.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 https://www.jfac.or.kr/site/main/home
황학정 가는 길은 찾기 어렵지 않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사직단 정류장에 내려서 그대로 쭉 사직단 담장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이런 모퉁이가 나온다. 모퉁이를 돌아 계속 담장을 따라서 직진. 그대로 오른쪽 길을 따라서 가다보면 황학정이 나온다. 도보로 5분 약간 넘는 정도의 거리. 가는 길이 뭔가 조용하고 운치있다. 산에 가까워져서 그런걸까.
황학정으로 들어서면 이렇게 보행자 통로가 있다. 청사초롱이 걸린 좁은 길을 따라가다보면 왼쪽에 사무실이 있고, 사무실을 지나 계속 가다보면 국궁전시관이 나온다. 가다보면 오른쪽에 과녁들도 보인다. 실제로 사용한 것인지 구멍이 많이 뚫려있다. 양궁에서 보던 빨강, 노랑, 파랑의 과녁이 아니라 민화같은 그림 과녁이라니, 옛스러운 느낌이 풀풀 났다. 그림 과녁에서는 점수를 매기는게 쉽지 않을 것 같긴한데...... 처음에 사람들이 활을 만들고 쏜 목적은 스포츠가 아니라 동물들을 사냥하게 위해서였으니 어쩌면 동물 그림 과녁이 더 현실적인지도 모른다.
국궁전시관으로 들어가서 체험 예약확인 및 현장결제를 하고 전시관을 안내해주시는 선생님을 따라 체험방으로 갔다. 체험방 옆에는 저렇게 천으로 된 과녁이 한 벽을 다 덮고 있었다. 활을 만들고 나면 실제로 저 과녁에 활을 쏘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활 만들기 체험은 실제로 활 자체를 만드는 체험은 아니다. 나중에 국궁전시관을 돌아볼 때 활 만드는 과정을 봤는데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웠다. 짧은 시간 안에 체험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건 활의 약한 부분을 보강해주기 위해 실을 감는 작업이다. 체험방 한쪽 편에는 색색의 예쁜 실들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져 있다. 방 한구석에는 한복같은 것들이 걸려있는데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복인듯했다.
활에 실을 감는 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감는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시관 안내해주는 선생님이 친절하게 다 가르쳐주셔서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단순 작업인데도 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각궁을 쏘기 전에 어떻게 보관하고 손질해야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어마무시했다. 활은 그냥 걸어놓고 필요할 때 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한번 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각궁 이야기를 들으니 활은 만들 때부터 쏘는 순간까지 굉장히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온 몸과 마음으로 내는 활'이랄까. 헝가리에서도 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신기했다. 국궁전시관에는 헝가리를 비롯한 외국의 활들도 전시되어 있다.
활에 실을 감고 시위를 거는 작업까지 하니 체험이 거의 끝났다. 그 다음에는 쏘는 법을 배운다. 오른손잡이면 왼손으로 활 가운데 부분을 쥐고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겨서 활을 쏜다. 화살 끝에 갈라진 부분인 오늬를 시위에 걸어야 하는데 선생님이 빨간 매직으로 위치를 표시해주셨다. 그리고 오늬가 걸리는 부분만큼 밑으로 내려온 곳의 시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면 된다. 과녁은 멧돼지 모양이라는데 당하관들이 쏘던 과녁이라고 한다. 지위에 따라서 쏘는 과녁이 다른데, 임금님은 곰이 그려진 과녁을 사용했다고 한다. 체험용 활이라 화살촉 부분은 고무재질로 되어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처음 하는 거라 그런지 자세도 어색하고 멧돼지 가운데 부분을 맞추는게 생각보다는 좀 어려웠다. 자꾸 오른편만 맞히게 되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체험을 하는 사람도, 국궁전시관을 방문한 사람도 없어서 혼자 전세낸 듯 활쏘기를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기본을 가르쳐주시고 나중에는 혼자서 쐈다. 자세를 잊어버렸을 때는 바로 뒤에 있는 모니터에서 재생되는 활쏘기 장면들을 보면 도움이 된다. 시위를 당기느라 엄지손가락이 아파서 조금 고생했다. 테이핑할 수 있는 것을 가져가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실제로 활을 쥐어보니 뭔가 감회가 새롭다. 활이 처음 발명되고 총포에 의해 밀려나기 전까지, 이렇게 활을 쥔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함을 느꼈을까. 이 활로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도 지키고 먹을 것을 얻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 태어난 나는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래도 활을 쥔 느낌이 좋았다. 이 활로 내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네를 타고 내 몸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공간으로 날아가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재미있었다.
그 다음에는 국궁전시관을 둘러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니 새삼 묘한 기분이 든다. 나 자신의 정체성에는 성격이나 기호, 경험 등 개인적인 차원도 있겠지만, 내가 속한 민족의 특성같은 집단적인 차원도 존재한다. 그런데 집단적인 정체성, 특히 과거의 정체성과는 마주할 일이 별로 없다보니 이런 것 하나가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진다. 활쏘기를 배워볼까 싶기도 했다.
전시관에는 고종황제가 쏘던 활도 있었다. 고종황제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덕혜옹주다. 사랑하는 어린 딸에게조차 행복한 일생을 보장해줄 수 없었던 왕. 혹독한 시대에 왕이 되어 세종대왕과 같은 능력이 있었더라도 지킬 수 없었을 자리에 있었던 사람. 스스로의 무력함을 매일 곱씹을 수밖에 없었을 그에게 활은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활이 가져다주는 든든함과 자신의 능력이 몸 이상으로 확장되는 듯한 그 느낌은 고종황제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국궁전시관 뒷편으로 올라가면 실제 활을 쏘는 곳이 나온다. 먼 곳의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과녁 앞의 신호등같은 불빛이 과녁에 맞았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주로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었는데 활을 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황학정을 방문한 때는 초봄이었는데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았다. 피자와 함께 맥주 한잔 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주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근처에는 인왕산 자락길도 있고 내려오는 길에는 단군성전과 사직단도 구경할 수 있었다.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은 곳들이다. 황학정에서 만든 활이 꽤 커서 들고다니는게 조금 고생이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