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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23. 2018

여행치료: 남산 한옥마을(1)


  취미생활로 한국무용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국무용과 국악이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하지만 음악없는 춤이 어디 있을까.  나는 결국 국악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악은 초중고 이후 접할 일이 거의 없어서 굉장히 낯설고, 그러면서도 뻔한 음색이 고리타분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 음악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기본 동작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난감했다.  음악을 듣고 '흥'이 나지를 않았다.  안그래도 팔은 뻣뻣하고 발은 버벅거리는데 음악까지 어색하니 춤을 추는게 아니라 로봇이 허공을 휘젓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남산국악당의 '단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단장'은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주최하는 청년국악 육성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젊은 국악인들은 여러차례 오디션을 거치게 되는데 이 오디션 과정은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어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단장'의 청중평가단 모집 공고!  남산 한옥마을도 한바퀴 돌아보고 국악에도 익숙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 같았다.  과자와 음료도 준다길래  얼른 신청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을 신청했던 가장 큰 목적은 국악이나 과자가 아니었다.  이 프로그램이 있는 주에 중요한 시험 결과 발표가 있었다.  그동안 우울증에서 많이 회복되었지만 큰일이 다시 닥치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재난에 대비해서 보험을 여러개 드는 것처럼 발표일을 전후로 참여할 행사를 미리 많이 만들어두었다.  실제로 이 방법은 굉장히 효과가 있었다.  특히 '단장'처럼 음악에 몰입해서 흥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가야금을 연주하는 Hey String의 공연이 맨 처음이었다.  남산국악당 앞마당에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햇빛이 따가운 날이었는데 가야금 연주까지 지루하면 못 견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Hey String이 들려주는 가야금 소리는 뜻밖이었다.  그동안 국악이라고 들었던 것들이 뭐였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야금이 이렇게 강한 소리를 내는 악기라니?  중간중간 섞인 오션드럼의 바닷소리나 가야금을 두드리는 소리도 신선한 느낌이었다.  공연 내내 몰입이 되어서 더운 날씨도 잊어버렸다.

     



  그 다음 공연 장소는 남산국악당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하는 개울가였다.  각자 공연에 어울리는 장소를 선정하는 것도 오디션의 일부라고 들었다.  MuRR(뮤르)는 개울가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울 양쪽으로는 큰 돌들이 있어서 관객들은 돌 위에 앉아서 물에 발을 담그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다.  개울 반대편에서는 공연이 펼쳐졌다.  개울물 소리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대북 소리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조금 충격적이었다.  대북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거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북소리가 심장 고동보다도 훨씬 빠르고, 강하게 몸을 때리는데 맥박이 빨라 숨이 차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대북 연주가 끝나자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은 핸드팬의 차례였다.  물소리를 배경으로 부드럽게 번져나가는 핸드팬의 소리는 마치 빗방울이 물 위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생황 연주와 노래가 이어졌다.  나중에 뮤르가 핸드팬으로 연주한 곡을 유튜브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과 너무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자연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배경으로 들려왔던 그때의 핸드팬 소리가 훨씬 아름다웠던 것 같다.

    

     


  그 다음은 피리 연주였다.  피리 연주와 함께 무언극(?) 공연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분이 피리 소리에 맞춰 움직이면서 몸을 움직이셨는데...... 난해했다.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국악이나 연극에는 더더욱 문외한인 입장에서는 몰입해서 즐기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 다음은 서울천년타임캡슐 광장에서 공연이 있었다.  미로같은 통로를 따라 걸어가다보면 중앙에 세 방향으로 트인 광장이 나온다.  넋넋이라는 팀은 이곳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연주자들 바로 위에서 내리쬐고 있어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도 연주자들 쪽을 바라보기가 조금 힘들었다.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지도 모르게 세 방향에서 흘러드는 바람은 음악과 잘 어울렸다.  전부터 해금 연주를 듣고 싶었는데 좋았다.  




  그 다음은 극단 깍두기의 공연이었다.  극단 깍두기가 선택한 장소는 지금까지의 공연 장소 중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었다.  벤치도 많고 넓은 공터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깍두기의 공연은 사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유형의 공연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공연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것도 우울증 치료와 관련해서 분석해볼만한 문제이긴 한데, 나는 어릴 때부터 굉장히 내성적이고 남의 눈을 엄청 의식하는 편인데다 자존심이 세서 개그프로그램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을 따라하거나 하는 걸 해본 적이 없다.  그걸 내가 하는 것도 힘들고 남이 하는 걸 보는 것도 힘들어한다.  (그래서 개그프로그램도 잘 보지 않는다.)  남 앞에서 실수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항상 신경쓰고 쓸데없이 진지한게 내 성향이다.  그러다보니 남들과 어울려서 긴장을 풀거나 하는 일이 조금 힘들다.  


  극단 깍두기의 공연이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날은 그런 내 성향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굉장히 즐겁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거나 공연 내용 자체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싶고 공연을 보는 동안만큼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고 웃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보였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닿아서인지 나도 같이 웃고 같이 즐기고 싶었다.  재미있고 마음이 확 풀어지는 공연이었다.      

          



  마지막은 김정운의 공연이었다.  찐감자를 먹던 어린 소녀가 언니와 함께 공장에 취직하는 줄 알고 속아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언니는 죽고 자기만 살아 돌아와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스토리였던 것 같다.  초반의 할머니 연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연극은 세상의 보편적인 질서가 아닌, 배우와 관객의 합의하에 형성된 별도의 규칙에 따르는 별세계라는 것을 느끼면서 조금씩 몰입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제가 무거워서 힘들었다.  이 날 견딜 수 있는 멘탈의 용량을 조금 초과했다는 느낌이랄까.  글로 볼 때나 영화로 볼 때보다도 눈 앞에서 한 사람이 온 몸으로 연기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가 훨씬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만큼 그 주제가 불편했다.       

   



  공연이 다 끝난 뒤에는 청중평가단 평가지를 작성하고 음료 쿠폰을 받았다.  남산국악당 1층의 카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이었는데 호박식혜를 주문했다.  더운 날이라 그런지 호박식혜가 더 달고 시원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우울증에 맞서서 나 자신의 일상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가끔 공연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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