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서 벗어나고, 또 벗어난 다음에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울증 인생의 스토리를 만드는게 굉장히 중요하다. 남들한테 이야기할 때도 필요하고,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하다.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워 숨기는 일들은 결국 안에서는 내 자존감을 깎아먹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증으로 인해서 많은 것들을 잃고 수치심도 느끼고 뭔가 인생이 망쳐진 것 같다고 여겨지면, 그렇지 않은 (정확하게 말하면 "망쳤으나 그래서 더 괜찮은")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나 스스로도 그걸 진심으로 믿게 되고 내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지금의 나는 그렇다.
사람 안에는 '내 인생이 괜찮아보였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있다. 대단해보일 것까지도 없고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는 인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나답게, 당당하게, 내 방식대로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였으면 하는 욕구다.
깊은 우울증의 악순환에 빠져있을 때 발목을 잡는 것 중 하나에 이것도 있다. 나 스스로 내 인생은 완전히 망쳐졌고 어떻게 해도 만회할 수 없으니 죽는게 나을수도 있다는 마음. 게임에서 캐릭터가 망했으면 지우고 새로 만들거나 잘 키운 남의 계정을 사거나 할 수도 있는데 인생에는 그런게 없다. 내가 경험한 일들, 과거의 나 자신 등등...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없애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우울증에서 나을수도 없고, 유일한 리셋 방법인 자살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다. 우울증이라 판단력이 흐려져서 빠지는게 아니라, 그런 곳들에서 내 인생이 실패가 아니라는 '스토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간다.
지금까지 겪어온 것들은 그냥 아무 의미없는 패배가 아니라 위대한 어떤 계획자(교주든 신이든)에게 다다르기 위한 고난의 길이었고 이 길에서는 앞으로 우울할 일이 없을 거라고, 지고의 행복을 누리고 성공할 거라고, 그동안 부러워했던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은 다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주기 때문에 빠져드는 경우도 많다. 거기에 단단한 공동체까지 뒷받침되니 혼자 외로웠던 사람들에게는 마약이나 다를바 없다.
나도 여기저기서 스카우트(?)를 많이 받은 편인데 다행히 한군데도 빠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불안장애 덕분에 모든 것에 조심스럽고 경계의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성격이 수직적인 체계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아무튼, 그만큼 우리에게는 스토리를 만드는게 중요하다. 우울증에 걸렸고 오랫동안 힘들어했고 가족들은 이런 문제가 있고 바보같은 선택을 했고 트라우마가 남을 만큼의 경험을 했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당하고 현재 잘 살고 있고 그 모든게 나만의 삶이었다는걸 긍정하는 스토리 말이다. 이걸 나 자신에게 들려줘야 하고, 남들에게도 들려주면 더 좋다.
우리의 스토리의 시작점은 우울증이 될 것이다.
1. 어떤 실패가 있었어. 가정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었어. 어떤 상처가 있었어.
2. 그래서 나는 얼만큼 힘들었고 내 인생이 이렇게 됐어.
3. 그런데 나는 이런 것들을 하면서 우울증을 좀 이겨낼 수 있었어.
4. 그 과정에서 내가 이걸 하면 즐거워진다는걸 알게 됐어.
5. 내가 겪은 문제를 남들도 겪고 있다는걸 알게 돼서 사회적으로 이 분야에 관심도 갖게 됐어.
6. 그러다보니 이게 직업이 됐어.
7. 그리고 직업 외에도 이런저런 단체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활동들을 하고 있어.
8. 내가 경험한 그 모든 일들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온 것 같아.
9. 나는 지금 만족스럽고 사람들도 도우면서 잘 살고 있어.
이건 내가 만들어온 스토리고, 지금 만족하고 있는 스토리다. 이렇게 스토리를 쓰려면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뭔가 활동을 해야한다.
집 안에서의 활동이라면, 교육도 받고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어떤 공익단체가 주관하는 텀블벅 펀딩에 참여하는 것도 좋고 요즘에는 두더지땅굴, 닛커넥트처럼 사회적 고립 청년들을 연결시키고 뭔가 해볼 기회를 주는 단체들도 있다. 그런 곳에서 온라인으로도 뭔가를 시작해볼 수 있다. 집 밖에서의 활동도 비슷하다. 교육, 프로그램 참여, 활동가 모집에 참여하기, 봉사활동 하기, 알바해보기 등등.
나는 구청 홈페이지, 서울시 npo지원센터 홈페이지, 복지관 홈페이지, 도서관 홈페이지, 정보퐁퐁(카톡), 문화재단이나 문화원 홈페이지, 오렌지레터(이메일 구독) 등을 주로 이용했다. 그런 곳에는 지역사회에서 하는 온갖 다양한 프로그램들, 교육들이 올라오는데 대부분 재료비 정도를 받거나 무료 교육들이 많다.
맨 처음에는 무료(5만원 이내)이기만 하면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에 참여를 했다. 관심사가 맞든 안맞든 싫지만 않으면 다 가서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면 뭔가 즐거운 것도 찾게 되고 거기서 만난 사람 등을 통해 연결이 되어 더 많은 정보들도 얻게 된다. 활동가로서의 경력이 쌓이는 건 덤이다.
그게 3~5번의 과정이고, 6번도 따라올 수 있다. 예를들면 환경 관련 교육을 받고 활동을 하다가 관련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게 쉽지는 않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 나는 2018년도에 우연히 마을활동을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 5년에 걸쳐서 이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브런치에 쓰여진 방법대로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머릿속에서 우울증을 잊어버리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수도 있다. 우울증을 잊으려면 뭐라도 해야되니까 뭐라도 하고, 그러다보면 진짜 인생에 뭐라도 쓰여진다.
이 '스토리'는 사실에 기반하지만 꼭 진실일 필요는 없다. 무슨 얘기냐면, 내가 주민자치회에 취직한 이유가 실제로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콜센터는 가기 싫고 유일하게 찾은데가 거기였기 때문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솔직한 마음이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고 마을 공동체 안에서 치유를 경험했으며 그 과정에서 마을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서 주민자치회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해도 된다.
우리는 뭐가 진실인지 판단할 수 없다. 우리 마음에는 정말 수많은 갈래가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먹고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일하고 싶지만 갈데가 없어서 부끄러운 마음도 있다. 수많은 마음들 중 어느 하나가 꼭 진실이라고 말할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장하거나 거짓에 기반하면 안된다. 그러면 바로 자존감이 깎이니까. 내가 실제로 한 활동들, 어느정도 갖고 있었던 마음들을 바탕으로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게 조금씩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해준다. 면접을 볼 때 왜 경력단절이 되었는지 물어보는 면접관에게, 젊은 사람이 왜 주민자치회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동료들에게 등등.
예전보다 확실히 우울증에 관한 사회적인 인식이 많이 나아졌다는걸 느낀다. 나는 주민자치회에 지원했을 때 면접에서, 그리고 지금의 임기제 공무원 면접에서도 모두 우울증에 관한 이 스토리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다 합격했다. (나는 경력단절이 워낙 크기 때문에 말을 안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우울증에 걸렸고 이러저러해서 자존감도 낮고 쭈구리입니다...'라는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우울증이 아니라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렸지만 이렇게 극복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좋게 봐주는 것 같다. 물론 다 그렇지 않을거라는건 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받아주지 않는 조직에는 나도 안가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조직문화가 괜찮은 곳을 선택할 권리는 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나 자신이 당당해진다고 느낀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긍정할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주변에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자존감을 얻게 되는 것 같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우울과 실패에 관한 나만의 스토리가 꼭 필요한 이유이다.
정말 '나'만의 이야기다. 그래서 내가 잃어버리면 누구도 대신 찾아줄 수 없는, 외로운 길이기도 하다. 힘든 길이겠지만 너무 처음부터 목적지를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한걸음씩 걸어가보면 어떨까. 재밌는걸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