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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09. 2023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자괴감

남에게 뱃살을 보여주는 기분

뱃...살


내 이야기를 남에게 꺼내놓으면, 정말 치유가 될까?


심리상담 대상자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한번, 선정되어 2022년 12월에 상담받을 때 한번, 그리고 심리검사 날(상담사와 다른 사람이었다) 한번, 2023년 초에 다른 상담소에서 상담받는 날 한번, 총 번에 걸쳐 초면인 사람에게 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죽지 않은 나 자신을 칭찬한다. 그만큼 힘들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 전문가였고 인간적으로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솔직하게 거의 다 말한다. 기억이 닿는 한도에서. 내 앞에 있는 상담사가 나를 어떻게 볼지 두려워서 시선을 벽에 둔 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한다. 치료를 받고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니까 내 마음의 장기들을 하나 하나 꺼내 환부를 보여준다.


맨 처음에 생명의 전화 복지관에서 무료 심리상담 대상자로 선정되기 위한 개인면담을 했다. 나는 간단한 개인정보 정도 묻는건줄 알았는데 꽤 깊게 들어갔다. 작은 회의실에서, 낯선 사람(아마 사회복지사가 아니었을까...) 앞에서 갑자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이야기를 해야했다.


사실... 마지막 실패 후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한게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리상담 대상자는 소수만 선정된다고 하니 증상이 심각해보여야 대상자에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심각해보이고 싶지 않은 반발심이 들었다. 아직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내 지나간 인생들(20년 우울, 은둔형 외톨이 등등)과 지금 가장 큰 문제인 상처에 대해 말하는게 너무 힘들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남 얘기하듯 무미건조하게, 소설책 줄거리를 요약하듯 줄여서 내 인생책을 읽어줬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게 짜증이 나고 피곤했다. 빨리 끝내고 싶었다. 나는 어디, 여긴 누구의 심경이었다. 그런데도 어찌어찌 선정이 되었다. 제3자가 듣기엔 줄거리만으로도 심각해보였나보다.


실제 상담은 사설 상담소에서 받았다. 이때는 두번째라 그랬는지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내 마음의 아픈 부분들이 많이 건드려졌다. 이야기하다 울컥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내가 울 줄은 몰랐다. 지난 2년간 즐거웠고 괜찮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괜찮지 않았던 거였다. 마음의 상처가 너무 아픈데, 아픈걸 느껴버리면 죽을 것 같으니까 덮고 또 덮어서 차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때는 시험에서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아빠의 아바타로 살았던 시간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2023년 1월에 다른 곳에서 상담을 시작했을 땐 좀더 구체적인 기억들로 들어갔다. 대학원 때 밤에 시험을 치고 춥고 캄캄한 운동장 옆길을 돌아오면서 느꼈던 감정들, 모 교수가 나를 불러 수준이 심각하게 낮다고 걱정해준(?) 일, 처음엔 B로, 나중엔 C로 도배된 성적들. 하나 둘 진로가 결정되어 좋은 곳으로 가는데 불 다 꺼진 텅 빈 면접장에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


너무 초라하고 초라한게 반복되면 어느순간 눈물도 안 나고 그냥 압착되어 버린다. 차에 밟혀 우그러지다가 마지막 즈음엔 완전히 뻗어 바닥과 일체가 되는 콜라캔처럼. 그 아픔들이 새삼 떠올라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은둔형외톨이로 살았던 시절의 고통들. 조그만 내 방에 스스로(?) 갇혀서 우울증의 고통을 겪으며 나오지도 못하고 절망 속에서 아팠던 일...


파고들어 가다보니 최근의 실패만 아픈게 아니었다. 내 마음속 상처는 거대한 빙산과도 같았다. 한층한층 누적되었던 것들이었다. 하나의 누락도 없이, 내가 받은 모든 상처들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이미 상담 8회기를 받으면서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울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상담사에게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말하면서 나는 내가 어떤 경험을 했고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이야기 했다. 찾아나갔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알지만 모르는 나라는 유적을, 그 벽면에 새겨진 상처와 또 성공들을 상담사에게 이야기하면서 하나씩 발굴해냈다.


그러다 어느순간 벽에 부딪혔다. 좋아, 상처들을 알고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스스로 위로하는건 좋아. 근데 그렇게 꺼내놓은 상처들은 어떻게 치료하지? 나는 상담을 받기 전보다 더 아파졌다. 총 19번에 걸쳐 발굴한 상처들이 도처에서 고통의 신호를 보내오는데 나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상담사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이렇게 꺼낸 상처들은 어떻게 치료하나요?"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몸에 났던 상처가 나은 경험이 생각나냐고. 아무리 깊은 상처도 언젠가는 아무는 것처럼 내 마음의 상처도 아주 천천히 아물고 있다고 믿는게 중요하다고. 그리고 상처가 아플 때마다 과거의 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변호해줘야 된다고. 과거의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동안 나를 잘 돌봐왔다는걸 나에게 계속 이야기해줘야 한다고.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했더라면 상처들이 안 생겼거나 아주 얕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받을만한 일이 생겼을 때, 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나를 보호하고 존중하고 변호해줬더라면 그 칼은 나를 비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그 순간 자책과 후회를 선택했기 때문에 제대로 칼을 맞아버린게 아닐까.


더 좋은 다른 방법은 모르겠다. 나는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나를 변호하고, 그리고 상처를 더 만들지 않기 위해 현재의 나를 돌보고 변호한다. 변화는 모르겠다. 그저 그러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게 내가 상담에서 배운 것들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이야기를 모두 꺼내고 남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경험을 했다는게 중요한 것 같다. 수치스럽고 잘못했고 바보같았던 나를 상담사 선생님들이 들어주고 받아들여줬을 때 나는  괜찮아진, 떳떳해진 기분이었다.


정말 내 잘못이 아니었고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는 경험들이었고 나는 지금 있는 이대로 괜찮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상담실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자유로워진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확 열리고 무거운 짐덩이들이 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뒤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 이야기를 좀더 편하게 하게 된 듯하다. '뱃살'쯤 누구에게나 있는 거라고, 내 '뱃살'도 이상한거 하나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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