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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07. 2023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위험성

안되는게 당연해요


이건 내가 십몇년 전쯤, 한창 우울증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어떤 책에서 발췌해서 적어놓은 글이다. 아마 박경숙 작가의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이었을 것 같다.


굉장히 감명깊게 읽었고 저자 본인이 10년간 경험한 끝에 나온 이야기들이라 설득력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 옆에 두고 보려고 가장 와닿는 부분들만 발췌해서 적어두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의 방법대로 우울증과 무기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저자는 10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지만, 내 추측엔 저 내용을 깨닫고 배우는데 10년이 걸린 거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의 시간이지 버린 시간이 아니다. 내 책도 마찬가지다. 그건 내가 20년에 걸쳐서 깨닫고 몸에 익힌 나만의 깨달음이다.


나는 무기력에 관한 저 발췌문들을 힘이 들 때마다 옆에 놓고 봤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는 책에 적힌대로 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 맞는 말인 줄은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으로는 옮길 수 없었다.


나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10년 동안 고통을 겪으며 깨닫고 습관으로 만든 것들이 내가 책 몇번 본다고 배워지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거다.


이런 종류의 책(내 책을 포함해서)은 그저 나침반일 뿐이다. 나침반은 우리에게 동쪽, 남쪽, 서쪽, 북쪽... 이런 정도만을 알려준다. 거기에 무슨 길이 있고 무슨 마을이 있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거길 직접 가봐야 하는건 나 자신이다.


단, 길을 잃거나 헤매는 순간에는 나침반이 제 역할을 수행한다.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 방향을 알려주는 것, 그게 이 책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다.


나는 저 발췌문 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지만, 자주 보다보니 머리에 들어가고, 힘든 순간이나 선택의 순간에는 그 내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향은 이쪽이구나..."라는걸 알 수 있었다. 내 발은 내가 통제할 수 없어서 그 방향으로 쭉 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약간이나마 힘이 생겼을 때는 그쪽으로 가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래서 혹시 이런 무기력,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관한 책들을 읽고 '왜 나는 안되는 거지?'라는 실망을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하면 우울증에서 바로 벗어날거야!'라는 믿음을 갖고 읽으면 너무 위험하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데 나는 뭘 해도 안되는구나 하고 괜히 자책하고 절망에 빠질수도 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가 불교 경전들을 읽는다고 바로 부처가 가졌던 깨달음을 얻게 되는건 아니다. 그건 나침반의 역할을 할 뿐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건 부처가 아닌, 우리 자신의 인생에 맞는 깨달음이다.


나는 우울증은 병이면서 동시에 구도자의 길에 강제로 입문하게 된거라고 생각한다. 부처는 스스로 부귀영화를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났지만, 우리는 우울증놈 덕분에 강제로 부귀영화(의 기회)를 뺏기고 그 길에 서게 됐다. 탈주도 불가능하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우울증의 고통들에는 질문이 숨어있다. 못생김의 고통 뒤에는 '이렇게 못생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 나는 이 얼굴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들어있을지 모른다.


질문들은 우리의 화두와도 같다. 나는 왜 시험에 실패한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가, 내 가족은 이 모양인데 왜 나는 버리지 못하는가 등등.


그 고통, 그리고 질문들을 품고 구도자의 길을 걸어간다. 사람은 왜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가를 고민하며 길을 떠난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은 조금씩 쌓이다가 길 끝에 섰을 때 비로소 온다. 그 깨달음은 책에 쓰여있는게 아니라 내가 걸어온 그 모든 시간들, 내 고통과 눈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남의 책은 참고만 될 뿐, 결국 내 책을 써야 한다. 우울증은 그때 비로소 가라앉는다.


'왜 우리만...' 이런 일을 겪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기왕 잡혀온거, 이 길에도 의미는 있다는걸 알고 가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 No. 우울의 구도자?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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