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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21. 2023

발이 묶인 채 자란 코끼리

정말 할 수 없었다

아빠와의 관계에 대해서 상담사 선생님과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현재 내 인생이 만족스러워야 아빠에 대한 원망이 줄어든다는거. 결국 내가 행복하고 잘 되어야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대해줄 수 있는 거였다.


어느 회기에 내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만일 제가 진짜 원하는게 있었고, 그걸 아빠한테 강하게 말했더라면 제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내가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진짜 집을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아빠와의 갈등에서 별로 참지 않는 편이다. 싸우면 내 집이니까 나가서 니 맘대로 살라는게 내가 중학교 때부터 듣던 소리인데 이제는 그게 가능해졌으니까.


가끔은 원망을 토해내기도 한다. 아빠가 이런거 못하게 하지 않았냐, 아빠가 내 전공이며 커리어며 다 아빠 뜻대로 한거 아니냐.


그런데 좀 놀랄만한 반응이 돌아왔다. "내가 언제 못하게 했냐? 니가 말을 안했지. 그리고 니가 하고 싶은 일이 다른게 있었어?"


차분한 머리로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랬다. 아빠가 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때는 엄마와의 관계, 아빠 직장 문제로 아빠가 짜증이 잦아서 내가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지레 짐작해서 안한 것들도 많았다. 그걸 나는 아빠 때문에 못한다고 기억했고, 아빠는 내가 그걸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전공에 대해서도... 내가 진지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게 없긴 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내 인생을 살지 못한게 내 잘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괴로웠다. 난 왜 내가 원하는걸 말하지 않았지, 난 왜 내가 원하는걸 찾지 않았지...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데 상담사님은 생각이 달랐다. 내가 발이 묶인 채 자란 코끼리와 같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묶여서 자란 코끼리는 나중에 밧줄이 없어져도, 성인이 되어서 자기 힘으로 끊을 수 있어도 그러지 못하고  자리에 계속 있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칭찬과 인정, 그리고 그럴 때 따라오는 애정에 묶여서 자란 나는 아빠가 원하는, 그리고 원할 것 같은 일들 이상은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그 당시엔 내가 원하는걸 찾거나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상담사 선생님은 나 스스로를 변호해줘야 한다고 했다. 무능한게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거라고. 그래도 끝까지 버틴게 대단한 거라고...


맞는 말이다. 나라도 내 편에서 이야기해줘야지. 그리고 사실이기도 하다. 아빠의 아바타처럼 키워진 내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땐 더더욱 약하고 어렸으니까.


그래도 나는 현재엔 내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아빠든 누구에게든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고 내가 하고싶은것을 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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