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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13.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

상처는 잘 안낫는다


지금의 나는 상처가 없어서 잘 사는게 아니라,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건드려지면 눈물이 나는 상처들이 아직도 많다. 그렇지만 그게 내 발걸음을 잡아당기지는 않는다. 


나는 상처가 쉽게 낫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과 상처는 별개인 것 같다. 상처를 준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준건 병주고 약을 준게 아니라 병을 주고 바나나를 준 것 같은 느낌이다. 상처는 그것대로 아프지만 바나나는 그것대로 맛있다.


상처는 상처대로 기억에 남고 좋은건 좋은대로 기억에 남는다. 좋은게 더 많으면 현재의 내 감정은 좋아질 수 있다. 사람은 망각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무의식에는 분명히 그 상처가 남아있다.


너무 오래 잊고 지내면 우울증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기도 한다.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눈물이 나고 고통의 시간이 와서 원인을 찾다가 과거의 상처들에게까지 이르게 되기도 한다.


때로는 지금의 내 모습이 상처의 흔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사람을 만날 때 조심스럽고 소심하고 굽신거리고 모든걸 맞춰주려고 하는 나는 왕따로 인한 상처의 흔적이다. 그때 움츠러든 상태대로 굳어버린 내 모습이다. 겸손함이 아니라.

 

결혼상대를 찾지 않고 연애조차 피하는 내 모습에는 복합적인 상처가 있다. 부모님이 성격차이로 평생 싸우는걸 보면서 자란 나는 누구랑 살아도 불행할 것 같다. 연애를 피하는건 외모에 대한 상처가 있어서 그런 부분이 크다.


사람의 정신에도 찰흙처럼 형체가 있다면, 어떤 부분은 나, 부모님, 친구들이 공들여 빚은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망치로 맞아 우그러진 채로 굳어버린 곳이 있을 것이다. 어떤 곳은 예쁘고 어떤 곳은 보기싫게 움푹 파이고... 그런데 그 모든게 나 자신이다. 싫더라도 현재 그 모습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상처가 있음에도 그걸 넘어설 수 있는건 내가 살고싶은 마음이 상처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살고싶다. 내 감각과 욕구들을 만족시켜주면서 좀더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상처로 힘들었던 마음들이 살고싶은 마음에게 무대를 내어준 것 같다.


한때는 우울증이 나으려면 과거의 상처들을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부정적인 기억들을 마주하고 다뤄야 한다. 우울증일 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도 대부분 잊고 사는거지 치유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 반대로 살고싶은 마음을 키워주는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상처들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너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살아보고 싶다고 주장하고 있는 희미하고 작은 그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내가 뭘 하면 즐거운지, 뭘 해보고 싶은지 평소에 기억해두었다가 힘이 들 땐 그걸 한다. 동네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좋다. 상처에서 잠시 벗어나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들을 나에게 준다. 그러면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다시 앞으로 나온다.


벽에 그려넣은 마지막 잎새처럼 지지 않는 그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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