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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Sep 03. 2023

정신과 약 복용 중간점검


내가 먹고있는 약은 이렇다.


1. 불안증 약

2. ADHD 약

3. 강박증 약

4. 우울증 약

5. 불면증 약


하루 세번에 걸쳐 나눠먹는거라 한번에 다 먹지는 않는다. 약도 센 편은 아니다. 약에 취해서 정신을 못차리거나 약 없으면 힘들어 죽겠거나 (가끔 안먹어도 모를만큼...) 감정 기복이 커지거나 그런건 전혀 없다.


오히려 정신과 약은 건조한 느낌이랄까. 감정과 나 사이에 벽을 쳐놓은 느낌... 강렬하고 열정적이고 심하게 분노하거나 절망하는, 그런 에너지가 큰 감정들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그런데 두꺼운 유리벽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그 감정들을 남의 것처럼 지켜보고, 나 자신은 차분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비타민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먹는다고 해서 어떤 강렬한 변화를 경험하진 않는다. 먹고 나서는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느낌도 없다.


그래서 먹은 후에 표시를 해두거나 아니면 약봉지를 책상에 남겨두거나 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두번 먹을수도 있다. 게으른 나는 약봉지를 남겨두는 편을 선택한다. 뜯어진 비닐 조각이 두개 있으면 그날 점심약까지 모두 먹었다는걸 알 수 있다.


나는 약이 잘 듣는 편이다. 퇴근하면서 오늘 왜 마음이 안좋지 하면 그날은 점심약(우울증)을 잊어버린 날일 수 있다.


불안증 약, ADHD, 불면증 약을 먹은지는 4개월이 넘었다.  후에 강박증 약이 추가되었고, 그 다음에 작은 사건들(한 3주 정도 내가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꼈다)이 좀 있어서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불안장애 약은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다. 이제는 어떤 일에든 심하게 불안해하는 일은 없다. 잠을 잘 때 불안으로 힘들었던 부분도 어느순간 해결됐다.


ADHD 약은 (요즘엔) 집중력은 별로 못 느끼겠지만, 식욕부진 상태를 만들어줘서 다이어트에는 큰 도움이 됐다. 집중력도 결국은 내 노력이 따라줘야 약의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는다는게 너무 힘들긴한데 어쨌든 도전하려고 한다. 한번은 넘어야 하는 산인 것 같다.


강박증 약은 강박증상들을 고쳐줬다. 이제는 출퇴근 지문을 찍고 여러번 확인하지 않는다. 보고서같은 문서들도 굳이 서너번 보면서 오타를 확인하진 않는다. 한번 꼼꼼하게 보고 나머진 나를 믿는다(!)... (이건 위험할수도 있다.) 원래는 이메일을 보낼 때 수신인의 메일 주소 알파벳 하나하나를 확인하는걸 몇번씩 반복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까진 하지 않는다.


우울증 약은 약간 떠오르던 우울증을 휘어잡아 다시 침몰시켜 버렸다. 먹은지 두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처음 먹을 때보다 감정기복이 많이 줄었다. 아직 문제가 되는 그 사건들과 감정의 응어리가 남아있어서 이게 다 풀릴 때까진 약에 의지해야할 것 같다.


불면증 약은 첫날부터 효과가 좋았다. 먹고 나서 방문을 닫으러 가거나 하면 비틀거릴 정도였다. 약을 먹으면 30분 이내에는 잠이 든다.


사실 몇가지는 안먹어도 될 것 같은데 담당 선생님의 판단에 따르려고 한다.




약을 먹고난 후기는... '멋진 신세계'라는 느낌이다. 약 한두알로 내 감정을 구원할 수 있다니. 안락하고 아늑한 느낌, 왜 병원 가기를 두려워 했을까 하는 의문, 약이 잘 받는 편이라 다행이라는 안도감 등등이 있다. 


섵부르게 내 감정과 대면했다간 자존감이 다시 내팽개쳐질까봐, 직장생활을 하면서 안좋은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이번엔 약에 의존하려고 한다. 약은 나를 투명한 유리막으로 감싸준다. 덜 들리고 덜 보인다. 유리벽 밖의 것들은 나를 위협하지 못한다.


마음은 아픈데 기분은 평온하다. 미소도 지을 수 있다. 슬프지만 마음은 여유롭다. 평가에 민감했던 내가 남의 말을 흘려듣는게 가능해졌다.


아직 특별한 부작용은 없는 편이다. 다만 내 진짜 감정을 알 수가 없어서... 다룰수도 없다.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정리가 가능한데, 큰 감정들은 보이기만 할뿐 느껴지질 않아서 어떻게 처리도 할 수가 없다. 파래를 묻힌 한과같은 퍼석한 감정들을 그냥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왜 우울증 약을 막연히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액체처럼 마음을 적시던 감정들이 고체가 되어서 아무 느낌없이 스쳐지나가니까 내가 누군지 혼란스러운거 아닐까. 내 감정들이 낯설다. 그리고 나도 낯설다. 여기 이 글을 쓰고있는 나는 누구일까...



아무튼, 그럼에도 약은 적극 추천한다. 우울증일 땐 아프고 힘드니까 약을 먹어서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피하는게 정말 중요하다. 우울증약이 타이레놀같은 진통제 역할을 한다랄까.


우울증이 왔다는건 이미 우리 마음의 면역력이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우울증으로 계속 고통받는 동안에는 모든 에너지가 다 고통을 견디는데 쓰여 마음의 방어선을 다시 세울 여력이 없다.


그게 우울증의 악순환인데, 약을 통해 고통에서 한발 물러난 채로 마음에게 회복할 시간을 준다면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때 약을 먹으면 금방 괜찮아지기도 한다. 지나가는 감기였던 것처럼. 그래서 열심히 병원에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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