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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14. 2023

고장난건 맞아


여름날 새벽 6시 44분의 하늘. 파랑에 확 빠져드는 기분이다. 새벽인데도 아침의 하늘같다. 파란색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데 이 파랑은 마음에 든다. 바람에 색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새벽에 이슬이 묻은듯한 공기를 마시면서 길을 걸을 때,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걸 느낀다. 내가 몸이라는걸 갖고 있고, 나는 어떤 인생을 살다가 현재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하는 것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덜 깬 정신이 과거를 헤매다 현주소를 찾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현실로 돌아온 나는 내 현상태를 관찰한다. 나의 괜찮은 부분들, 그리고 망가진 부분들을 하나씩 본다.


괜찮은 부분은 직장이 있다는거, 직장이 가고싶은 곳이라는거, 건강하다는거, 살이 많이 빠진 몸을 갖고 있다는거, 오늘도 글쓰기를 했다는거 등등.


망가진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여러번 노력했는데도 나는 아직 책을 읽지 못한다. 외국어 공부도 못하고 있다. 업무에 관한 공부도 못하고 있다. (안해도 되지만 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다) 더 소심해지기도 했다. 


망가졌다거나 고장났다고 하면 누구나 부정적인 느낌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나의 몇몇 부분들이 고장났다는걸. 우울증이 나아도 후유증은 있다는걸.


그리고 여기서부터 출발해보고 싶다. 내가 오래전에 가야된다고 생각했던 만큼 멀리, 높이는 못가겠지만 내가  지금 가고싶다고 생각하는 길을, 원하는 속도와 방향으로 갈 수는 있다. 느긋하게. 지금의 나는 질주는 못하지만 아직 산책은 할 수 있으니까.


재활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 3~4년째 가끔씩 시도해보고 있는데 아직은 잘 안된다.


이럴 때 조급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담스러운 과업을 주고, 해내지 못하면 자책하고, 절망해버리는건 우울증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인생은 과거를 만회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에서 새로 시작되는 건데 예전에는 잘 몰라서 우울증의 함정에 많이 빠지곤 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아무 빚진 것 없이 그저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 지금 고장난 부분이 언젠가는 나아질지, 아니면 평생 이대로일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생각이다. 나아지면 목적지에 빨리 도달해서 좋고, 안나아지면 천천히 산책하면서 달릴 때 지나쳐버리는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누히 이야기했듯이 우리에게는 받아들이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극한의 노력을 하더라도 현재를 받아들이는게 우선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점심 메뉴는 두 가지밖에 없다.


A코스: 현실부정, 우울증, 무기력, 노력 못함, 더 망함

B코스: 현실수용, 우울증 없음, 노력 가능, 노력 안해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음


새벽 길을 걸어올라가면서 현재에 단단히 발 딛는 나를 느낀다. 그리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는 이미 전의 걸음은 과거로 흘러가버렸다는 것도... 내 몸은 끝이없는 긴 강처럼 계속 흐르고 있다는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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