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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26. 2023

공간, 그리고 마음의 미니멀리스트

'버리기, 그리고 빈 공간에 살기'라는 명상

한 집에 30년간 사는 것의 단점은 물건을 덜어낼 기회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가끔이라도 이사를 다녔어야 가볍게 짐을 꾸리는데 익숙해졌을텐데... 아쉽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 집에 많은 물건들이 쌓였다.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드로잉 노트 세권이 있다. 한권을 다 쓰면 다음게 필요하니까 모두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선 8시에 집에 오는 직장인이 드로잉 노트 한권을 다 쓸 일이 거의 없다. 그 노트 세권은 4~5년째 책장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새거라서, 필요해서, 앞으로 쓸거라서, 귀여워서, 추억이 있어서 못버린게 너무 많다.


그러다 집 수리 공사를 하면서 짐을 모두 들어내게 되자 물건들은 무거운 짐이 되었다. 뭘 버릴지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필요없는 물건은 없다는걸 깨달았다. 필요를 따지기 시작하면 하나도 못 버린다는걸.


그래서 필요한 것도 거의 다 버렸고 지금 내 방엔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만 있다. 평소에 자주 쓰는 것들만 남겨두었다.


그 뒤로 계속 미니멀리스트로 살고 있다. 지난번에 갔던 미술관들의 굿즈샵에서도 지름신이 올 뻔 했지만 참았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의 미니 버전 하나만 사왔다.


이제는 물건을 살 때도 항상 쓸모를 생각한다. 이걸 당장 내일부터, 주기적으로 쓸건지 말건지. 그 생각을 하고 바로 내려놓은 물건이 꽤 된다.


그런데 신기한게 있다. 공간안에 물건이 적을수록 내 마음의 번잡함도 덜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보는건 벽지와 장판이다. 그것들을 가리는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에 있다보니 물건을 매개로 이것저것 잡다하게 생각할 일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명상이 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나에게 (추억과 동시에) 트라우마가 있는 물건들, 쓰지 않아서 항상 써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던 물건들을 내다버린 것도 큰 것 같다.


그러고보니 물건들은 그냥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내 인생과 여기저기 연결된 것들이었나보다. 나는 물건을 버리면서 내 인생의 부정적인 것들도 막 내다버렸던 것 같다. 내장을 비워낸 것 같은 텅 빈 공간에서 나는 마음도 상당부분 비워진걸 느낀다.


재미있는건 그렇게 버린 물건들 중에 지금 내가 간절하게 찾고 후회하는 물건은 없다는거. 원래도 필요없었던 거였다...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많은 물건들이. 내 안에 내가 애착을 갖고 붙들고 있었던 수많은 감정들도 그런건지 모른다.


마음의 미니멀리스트가 된 기분은 꽤 괜찮다. '버리기, 그리고 빈 공간에 살기'라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좋은 명상방법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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