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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Sep 20. 2023

여러 겹의 파이, 그리고 나


가끔씩 내 안부를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여러 겹의 나를 느낀다. 하나의 내가 있는게 아니라 수천 겹의 내가 겹쳐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악하게나마 나눠보자면, 현재의 여유로운 직장에 만족스러운 나, 현재 상황을 부끄러워하는 나, 과거에 실패를 경험하고 죽고 싶었던 나, 모교를 좋아하는 나, 모교의 수치같아 창피한 나, 지금 상상해보는 10년 후의 나... 이런 여러가지 '나'들을 한꺼번에 느끼게 된다.


그래서 한겹 한겹 들춰보면서 물어봐야 한다. 넌 괜찮아? 너는? 넌 어때? 어이, 거기~ 거기는 괜찮아요??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모든 감정과 기억의 가면을 쓴 '나'들이 내 안에 있다. 그들이 모두 혹은 대체로 만족한다고 대답할 때 나는 내가 안녕하다고 느낀다.


마음속에서도 과반수라는게 있나보다. 괜찮지 않은 마음들이 괜찮은 마음들보다 많으면 나는 괜찮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마음들의 비율은 수시로 바뀌는데, 안좋은 일을 겪거나(예를들면 직장에서 어이없는 일을 겪는다거나) 체력이 떨어져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을 땐 괜찮지 않다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퍼진다.


반대로 직장에서 좋은 일을 겪거나 과거의 나를 용서하거나 컨디션 좋은 날, 예쁜 선물을 받은 날, 좋은 사람들을 만난 날에는 괜찮다는 목소리가 과반을 넘긴다.


내 마음은 일정하지 않고 현재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 건강이나 마음 상태 등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특히나 우울증같은 병이 있으면 내 마음이라는 파이 전체에 검은 잉크를 부어버리는 것과 같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한겹 한겹 물들어 어느 하나 괜찮은 것이 없게 된다.)


이런 내 마음을 관리하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의 지금 마음이 곧 확정적인 내 모습이 아니라는걸, 같은 '나'라도 어떤 날엔 긍정적이고 어떤 날엔 절망적일 수 있다는걸 알고, 힘든 순간에 이 생각을 할 뿐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진짜 내 마음은 아닐 수 있다고.


그러면 절망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 사그라들고 현재 내가 이렇게 느끼고 있는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보게 된다. 예를 들면 다이어트를 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거나, 오늘 아침 있었던 직장의 누군가와의 기분나쁜 일때문이라거나, 어떤 감정적인 속상함 때문이라거나 하는.


구체적으로 이유를 알면 기분이 좀 나아지기도 한다. 뭉뚱그려서 절망적, 부정적이라고 하면 진짜 내가 못나고 바보라서 힘든 것 같은데, 지금 마음의 비율을 바꿔놓은 구체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면 그것만 다루면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잠을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면 내 마음은 괜찮아진다. 부모님의 다툼이 잘 해결되어도 내 마음은 평화를 되찾는다. 친구의 작은 응원에 자존감을 다시 세울 때도 있다.


예전엔 이런걸 몰라서 더 우울의 구덩이를 팠던 것 같다. 우울하고 힘들면 내가 잠은 잘 잤나, 어제 과제를 다 했나, 기분전환 될 만한 전시회는 보러갔나 하는 사소한 것들부터 챙길걸 그랬다. 막연하게 난 아무 희망도 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누가 마음은 하나라고 알려준걸까. 실제 내 마음은 이렇게 파이 속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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