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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r 04. 2018

우울증 환자를 위한 실전 매뉴얼(1)

밖으로 나가는 방법

(침대를 벗어날 수 있는 상태라면, 실천해보자)


준비물: 운동화

가져가지 말아야 하는 것: 이어폰


미션: 다이소에 가서 물건 세 가지 사오기


다이소에서 사온 일본 복고양이 자석과 노란 별모양 포스트잇과 마스킹테이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덤.


  운동이 우울증 치료에는 약만큼이나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운동하러 헬스장에 등록하거나 산이나 자연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심한 우울증 환자는 헬스장도 산도 피해야 한다!



  헬스장에 등록하면 사람은 자동적으로 돈을 낸 만큼 헬스장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일반인은 견뎌낼 수 있는 이 부담은 우울증 환자에게는 치명적이다.  


  보통 사람이든 우울증 환자든 헬스장에 등록해놓고 정기적으로 운동하러 나가는 것은 쉬운 결심은 아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헬스장에 나가지 못해도 '에잇, 그까짓거.  내가 원래 작심삼일이지 뭐.  그냥 다음에 가자.'  이렇게 생각하고 말지만, 우울증 환자는 '나같은 밥벌레에게 과분한 돈을 들여서 헬스장에 등록했는데 역시 이런 것도 못하다니 난 진짜 쓰레기였어.  나는 살 가치가 없어.'  이렇게 생각해버린다.   


  이게 우울증 환자의 사고방식이다.  헬스장에 등록해놓고 작심삼일하는 것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나 걸리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다는 걸 우울증 환자는 생각하지 못한다.  우울증에 걸린 무능한 자신만 못한다고 생각해버린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운동을 하려는 건데 더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아무 부담없이, 그날 그날 자기 기분에 따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



  산을 피해야 되는 이유는 고독 때문이다.  산, 자연... 물론 아름답고 공기도 좋고 정신건강에도 좋다.  그런데 산과 자연의 적막감, 고독함은 우울증 환자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우울증 환자는 안그래도 생각이 많고, 고통때문에 온갖 감수성과 감정이 폭발하는 상황에 있다.  심한 우울증 상태일 때는 그냥 아무 일이 없는데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  증상이 더 악화되어 아예 감정을 느낄 힘조차 없다고 생각되는 단계에 이르더라도 정신적으로 피폐한 건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적막과 고독 속에서 자기 내면을 성찰하며 혼자 등산을 하는 것은 우울한 상태를 악화시키는 일밖에 안 된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적당히 있는 거리를 걷는 게 가장 좋다.  사람들 속에 묻혀서 혼자 방구석에 있을 땐 느끼지 못하는, 그렇다고 사람을 만나서 얻고 싶은 정도의 강렬한 느낌은 아닌, 적당히 거리가 있는 생활의 온기를 느끼며 걷는게 좋다.  


  그렇다고 아무 목적 없이 거리로 나가서는 안 된다.  목적 없는 방황도 등산만큼이나 우울증 환자에게 해롭다.  목적은 분명하게.  


  그래서 집 근처 다이소에 가서 마음에 끌리는 물건 세 가지를 사오라는 거다.


아플 때는 싱싱한 과일을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좋은 기운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고 위로가 된다.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도 물질에는 약하다.  아니, 어쩌면 정신적으로 힘들수록 더 물질에 약해지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도, 일으켜세울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으니 외부의 물질을 소유하고 곁에 두는 행위로라도 나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싶다는 심리인지도 모른다.  다 떠나서, 예쁘고 귀여운 물건, 좋아하는 물건을 가지면 기분이 좋아지는게 인간이다!


  하지만 지름신이 아무데서나 함부로 강림했다가는 후폭풍이 더 심하다.  우울증 환자에게 산더미 같은 카드값은 절벽에서 사람 등 떠미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러니 아무리 질러도 지갑에 타격이 가지 않고, 우울증에 걸려 호기심을 상실한 사람의 눈길도 끌만큼 다양한 물건이 있는 다이소가 답이다.  다이소는 지점도 많아서 대개 걸어서 혹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쉽게 갈 수 있는 편이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걷고 중간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야한다면 타자.  가서 매장 전체를 둘러보고 관심있는 것 세 가지를 사오는 거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많은 것을 얻은 셈이다.  첫째, 상쾌한 바깥 공기를 쐬고 운동을 해서 기분이 나아졌다.  둘째, 예쁜 물건을 사서 기분이 좋아졌다.  셋째,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일상생활의 온기를 느꼈다.  넷째, 나는 뭔가를 결정하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섯째, 그러는 동안 나 지신과 우울증에 대해 잠시 잊어버렸다!


 


*다이소가 없다면 다른 장소라도 괜찮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차 한잔을 마시고 오는 것, KFC에 가서 치느님 한 조각을 영접하고 오는 것...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매일 장소를 바꿔가며 다녀도 좋다.  대신 출발하기 전에 장소는 명확하게 정하고 가야 한다.  그냥 '분위기 좋은 카페'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 '스타벅스' 이런 식으로.  목적도 정해야 한다.  서점에 가서 책이나 한번 구경해볼까 하는 것은 비추.  잡다한 생각을 할 여지를 만들지 말자.  서점에 간다면 무슨 무슨 책을 사오겠다고 결정하고 가는 편이 낫다.  


걸을 수 있는 만큼 열심히 걷고 돌아오는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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