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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아침 열기

 

최대한 반듯하게 걷기

 꿈속에서 진흙 길을 걷고 있었다. 돌 담 위에서 한 외국인 소년이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고 돌 담 위로 올라갔다. 노란 머리카락, 흰 피부에 붉은색 주근깨가 있고 작고 마른 체구였다. 

“아이 엠 프랭크.”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소년의 손을 잡고 걸어가서 모퉁이를 돌았을 때 흰색 대리석 바닥과 전면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미술관 같은 현대적인 공간이 나왔다. 눈앞에 한참을 우러러봐야 할 만큼 커다란 노란색 스마일 조형물이 있었다. 그 노란색 스마일은 투명한 유리 같은 재질로 되어 있었고, 하나의 일체감 있는 덩어리였는데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 작은 퍼즐 조각들로 맞물려 있었다. 


 


 그 즈음에 도서관에서『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인 강제수용소의 이야기였다. 무자비한 인권 탄압이 자행되는 강제 수용소에 대한 상세한 서술로 흡입력 있게 읽혀졌다. 한 장면에서 오래 전 교사 연수 강의 중에 들었던 이야기가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고, 그 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강하게 몰입되었던 장면이었다. 

 수감자들이 한 줄로 서서 장교가 서 있는 앞으로 걸어갔다. 장교는 사람들을 한 눈에 보고 오른쪽 아니면 왼쪽으로 보냈다. 이 행동의 이면에 깔린 무서운 의미는 오른쪽은 일을 하는 작업실 행이고, 왼쪽은 병자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특별 수용소 행이었다. 특별 수용소란 가스실과 같은 죽음의 영역이었다. 한마디로 오른쪽은 삶이었고, 왼쪽은 죽음이었다. 삶과 죽음이 손가락 하나로 결정되는 갈림길이었다. 책에는 주인공이 자신의 생사를 지정하는 장교 앞에서 ’최대한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했다.‘고 적혀있었다. 


 그 때 연수에서 들었던 내용으로는 왼쪽으로 가게 된 사람들은 이미 절망에 싸여 비틀거리고 장교 앞에 가서도 고개를 숙였지만 누가 보아도 왼쪽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작고 마른 주인공은 장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 때 장교의 눈을 응시하면서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덧붙이셨다. 

 “당신도 나도 똑같은 사람인데, 왜 당신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는가?”

 장교는 약간 망설이는듯하더니 오른쪽으로 보냈다고 했다. 삶이었다.

 누가 봐도 제일 먼저 죽을 것 같던 작고 병약해 보이는 이 수감자는 제공되는 한 컵의 물을 다 마시지 않고 양치를 했고, 유리 조각을 주워서 면도를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돼지가 되거나 성자가 되었다고 했다.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 행복과 그 안에서의 유머, 놀라운 인간의 정신에 대한 기록들은 나에게 깊숙이 각인되었다. 이 강인하고 아름다운 정신의 소유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긍정의 힘, 비극 속에서의 낙관을 발견하고, 그것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심리치료 기법으로 발전시킨 ‘빅터 프랭클’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인간의 강한 의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인간은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 시련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깨우쳤을 때 시련이 멈출 수 있다는 것,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킬 수 있는 길을 안내해주는 것이 ‘로고테라피’의 핵심이다. 

 휴일 날, 도서관에서 ‘무심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골라서 미간을 찌푸리며 몰입했던 나도 책 속에서, 텍스트의 홍수 속에서 삶을 밝혀줄 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꿈속에서 내 손을 잡아주었던 노란 머리의 외국인 소년, 

“아이 엠 프랭크.” 

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 소년이 바로 빅터 프랭클이었음을 깨달았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잃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다. 설령 의미를 잃는 순간이 온다 해도 ‘최대한 반듯하게’ 걸으려고 애쓰는 것으로 그 순간을 넘어 다음으로 갈 수 있다.


‘나도 그 분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그렇게 거룩하게,

그렇게 사람 눈에 띄지 않게, 그렇게 당당하게, 

그렇게 순진무구하고 신비스럽게, 

바라보고, 미소 짓고, 앉아 있고, 걸을 수 있었으면

정말로 좋겠다.

자기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간 사람만이

그렇게 진실하게 바라보고 그렇게 걷는거야.

좋다, 나도 나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가 보도록 애써볼 터이다.‘

-헤르만 헤세『싯다르타』 




죽음의 연습

 위기 상황일수록 다른 뭔가 급하게 하려고 서두르기 전에 척추를 반듯하게 세우고 호흡을 깊게 하는 것으로 의외로 많은 것들이 해결되는 것을 느꼈다. 습관적인 불안과 같은 감정으로 근육에 기본적으로 긴장이 많고, 그로인해 불필요한 피로도가 높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호흡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무렇게나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 것에서 보다 의식적인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체처럼 온몸에 긴장을 풀고 누워서 몸에 남아있는 힘을 한 번 더 빼준다. 그런 후에도 또 남아있는 긴장을 의식하고 한 번 더 빼준다. 이 동작을 하면서 정말 놀란다. 몸에 긴장을 다 뺐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더 긴장을 빼려고 하면 늘 더 뺄 수 있는 긴장이 남아있었다. 연습을 통해 더 빨리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근육의 긴장을 풀었다면 잠이 들 때 까지 호흡을 놓치지 말고 뱃속 깊이 공기를 넣었다 빼면서 호흡이 사라질 때 까지 미세한 의식을 관찰한다. 처음에는 몇 번 호흡하다가 호흡은 놓치고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곯아떨어지지만 반복적으로 의식하게 되면 보다 미세한 호흡과 미세한 의식을 느낄 수 있고 깸에서 잠으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는 통로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의식적인 잠으로의 명상은 잠의 질을 더 좋게 해서 숙면을 취하게 하고 강박적인 꿈을 멀리 하고 아침에 기분 좋게 잘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이끈다. 나는 잠으로 가는 이 의식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는데, 하면 할수록 새로운 미세한 정신의 영역이 계발됨을 느끼고 있다.

 잠은 작은 죽음이고 하루는 작은 인생이다. 잠을 잘 자고 잘 일어나고 하루 일과를 잘 보내고 오늘이 결과라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은 유익하다.



불사조처럼 깨어나기

 아침에는 불사조와 같은 기상으로 깨어난다. 

불사조(不死鳥)는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는 전설 속의 새다. 초기에는 장례를 치르는 영묘한 새로 그려지기도 했으나 점차 부활의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불멸의 새로 전승되었다. 

 고대 이집트 ‘태양의 도시’에는 불사조가 오백년마다 찾아오는 태양의 신전이 있었다. 불사조가 찾아와 제단에 내려앉은 뒤 날갯짓을 하여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재만 남을 때까지 활활 타오른다. 다음날이 되면 그 재 안에서 작은 벌레가 생겨나고, 그 벌레에서 날개가 돋아나서 불사조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자신이 죽었던 재 속에서 날아오른다. 

 어제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허둥대면서 일어나거나 피곤에 못 이겨서 어딘가에 끌려가듯이 일어나는 행위는 우주의 부정적인 측면에 반응하는 것이다. 아침의 시작을 반응으로 시작하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행위도 계속 반응하게 되기 쉽다. 반응은 자극하는 주체에 대한 객체로서의 행위이다. 이미 시작부터 주도권이 내 안에 있지 않다.

 밤의 어둠과 어제의 과거, 죽음에서 부활한 오늘 아침은 우주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며 어제와는 다른 새아침이다. 새아침의 밝음은 객체의 반응이 아닌 주체의 창조로 열어가야 한다. 창조의 주체 안에 아름다운 욕망을 품은 채. 




명상의 힘

 명상을 시작한지 백일이 되었고, 생각보다 큰 효과를 느끼고 있다.

명상이 좋다는 것이야 옛날 옛적에 알았지만 시도할 때 마다 당시의 나의 에너지와 맞지 않아서 시도와 동시에 포기하곤 했었다. 변화를 모색하고자 마음에 두고 있었던 뭔가를 시도하는 동기는 늘 그렇듯이 모종의 절박함이었다.


 이번에는 예전의 시도들과는 달리 책에서 말하는 명상의 좋다는 점이 곧바로 느껴졌고, 둘째 날, 셋째 날, 눈 뜨자마자 물을 마시고 싶듯이 이부자리를 정리하자마자 갈급하게 명상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명상을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결심한 마음이 지속되는 시간과 기운의 차이이다. 명상은 흐트러지는 마음을 모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준다. 


 아침 30분의 명상으로 나를 둘러싼 공기를 새롭게 정화하고, 일과 중에도 틈틈히 1분이라도 명상을 하는 것으로 흐트러진 몸과 마음의 균형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다.

촛불을 켜고 가부좌를 틀고 복식 호흡을 하면서 보다 형식을 갖춘 의식적인 명상은 사흘차이지만 오랜 세월 특별한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명상을 해온 것이 또 다른 형식으로 변형되어 더 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하루는 작은 인생이다. 시작은 가볍고 유쾌하고 기대로 가득 차 있지만 한낮의 더위와 난데없는 옆 사람의 기습적인 짜증으로, 또는 아무 일이 없는데도 그냥 오후 4시가 넘어가면서 급박한 불안이 찾아오기도 한다. 패기만만한 청년기가 지나고 중년으로 접어들었을 때, 아무 일이 없는데도 느닷없이 노후가 걱정되고 뭔가 서두르게 되는 것처럼 하루의 중년기가 느닷없는 불안으로 닥쳐오는 것이다.


 고개를 들고, 날개 뼈를 의식하면서 어느덧 뻣뻣해진 등 뒷공간을 부드럽게 스트레칭 해주면 앞 공간이 새롭게 펼쳐진다. 

몸과 마음이 사십칠년 전에 한번 태어난 이래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아침에 깨어난 이후로 작은 죽음인 잠을 맞이할 때 까지 끊임없이 변한다. 이를 의식한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입자의 파동을 즐기고 새롭게 정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달라이라마의 한 말씀

 "저의 경우 분석적 명상이 더 유용해요. 그저 분석하는 거예요.

통증의 경우 예를 들어 트라우마를 체험할 때, 그 체험은 이미 일어난 겁니다.

전에 제가 모든 문제는 본질적으로 무지에서 생긴다고 했죠. 무지는 분석적 태도를 가져오고 분석은 많은 정신적 문제를 가져와요. 현실을 받아들이고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합시다. 그럴 수 있잖아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죠. 끝이죠. 또한 정신적 요소에서 문제의 근원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영원성에 집착하는 겁니다. 지속적인 것에. 또한 극단적인 자기중심성 역시 또 다른 문제의 근원이죠.

이러한 개개의 정신적 질환에 우리는 다른 자세가 필요해요. 그래야 마음을 변화시키고 형성시킬 수 있어요. 그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지성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저는 명상보다는 잠을 잘 자라고 권하겠어요." 

(일동 큰 웃음과 크고 긴 박수)

- 2005년 11월 8일 화요일, '달라이라마 뇌과학의 만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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