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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천사처럼 커피 마시기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에게 사랑을 느낀 한 천사가 천사로서 죽고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다. 정신적인 존재인 천사는 물질 몸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다가 인간이 되고나서 빨강, 노랑, 파랑, 초록, 오렌지, 황토색……. 색깔을 배우면서 기뻐한다. 

 천사였다가 먼저 인간이 된 동료가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천사를 알아보고 말한다.

 “여기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말해주고 싶네. 

시원한 걸 만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담배와 커피 이걸 함께 하면 환상적이야.

그림도 그래. 연필로 굵은 선을 긋고 가는 선도 긋고, 그럼 멋진 선이 되지.

손이 시려오면 이렇게 비벼보게. 이것 또한 기분 좋지. 좋은 일은 아주 많아.

하지만 자네는 여기 없고 난 이곳에 있어. 이곳으로 와서 내게 말을 해봐.

난 친구니까. 동료라고.”  

 인간이 된 후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인간의 육체성을 느끼게 해주는 기념비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커피가 든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모습,   그리고 컵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커피 향을 맡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기쁜 미소를 짓는다. 다시 향을 맡고 다시 행복한 얼굴로 커피를 마신다. 그토록 원하던 감각을 처음으로 느끼는 천사였던 사람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소박하지만 육체의 무기력을 느낄 때 보면서 커피 한 잔으로도 금방 행복해질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색을 볼 수 있는 눈, 시원한 걸 만지는 좋은 기분, 연필로 선을 긋는 기쁨, 시린 손을 비빌 때 느끼는 온기….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또한 그렇기에 잘 느낄 수 없는 온기와 향과 맛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값진 자료다. 




 다음은 전직 청와대 비서관 이상휘 작가가 쓴 시다.

‘국수가 먹고 싶다

난장에 털썩 주저앉아 먹고 싶다

입 안이 터지도록 국수 가락을 삼킨다

찐빵도 먹고 싶다

김이 펄펄 나는 솥뚜껑을 열고 싶다

한입 가득 달콤한 팥 맛이 가득하다

막 버무린 햇김치도 먹고 싶다

엄마에게 꿀밤을 맞으며 그것들을 먹고 싶다

유난하게 그렇다‘


 도서관에서 이 시를 읽자마자 국수가 먹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서 쉬 가라앉지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있는 재래시장 국수집을 떠 올리며 혹시 국수집이 일찍 문을 닫을까 예상 보다 1시간 빨리 서둘러 도서관을 나왔다. 아직 불이 밝혀진 국수집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국수를 주문하려고 들어서자 국수는 안한단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집에 들어서서 라면으로 대신할까 했지만 그래도 사그러들지 않는 시장통 국수의 면면이 계속 나의 감각들을 자극하여 늦은 시간 국수집을 찾아 동네 투어에 나섰다. 찾아서 먹게 되면 좋고 못 먹어도 운동한 셈 치자면서. 가능성 있게 여겨지던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 분위기여서 오늘은 못 먹겠다 하고 돌아오려던 차에 아직 손님이 있는 국수집을 발견하고는 드디어 잔치 국수를 주문했다. 그 날의 잔치 국수는 또 다른 의미에서 나에게 진짜 ‘잔치’ 국수였다.

시에서처럼 볼이 미어터지도록 국수 가락을 휘감아 삼키고 싶었는데 기대보다는 못 미치는 맛과 느낌이었지만 어느 정도 해소되어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발걸음도 가벼웁게 집으로 돌아왔다. 문학에서 음식에 대한 묘사를 즐기는데 이렇게 짧고 간단한 문구에 이토록 장시간 지속 효과가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구구절절, 미사여구, 길고 긴 만연체에서 탈피하여 진솔, 소박, 담백한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국수도 시도 맛있었던 하루의 기억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정신의 존재인 천사가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자신을 말리는 동료 천사에게 하는 말이다.

"난 그러고 싶어.

힘든 일과 후 집에 와서 고양이에게 먹이도 주고 싶고 아파봤으면 좋겠어.

손때가 묻은 신문도 읽고 정신적인 것만이 아닌 육체적인 쾌락도 느끼고 싶어. 

목선이나 귀에 흥분해 보고도 싶고.

때론 거짓말도 하고. 걸을 때 움직이는 뼈를 느끼고.

전능하지 않아도 좋으니 예감이란 것도 느껴보고.

 '아!', '오!' 라고 외치고 싶어.

 '네', '아멘' 대신 악에 끌려보는 것도 괜찮지.

세상의 모든 악령을 받아들였다가 한꺼번에 내뱉는 거야.

미쳐보기도 하고, 미개인이 되고 싶어.

책상 밑에서 신발을 벗고 발가락도 뻗고 싶고. 이렇게 말이야.“


 '우리가 아무렇게나 허비한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다' 

라는 명언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궁극적인 답을 제시한다면 인간만의 특권인 육체를 잘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육체를 가진 인간을 통해서 신의 계획을 이룬다고 한다.

몸을 입고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이 천사처럼 한 잔의 커피를 얼마나 완벽하게 기쁨으로 즐기느냐에서 부터 시작하자.

말린 꽃잎 차의 예쁜 빛깔, 시고 달콤한 맛, 찬바람, 토독토독 빗소리, 뻐근한 등근육, 신비스럽게 피어올라가는 연기, 작은 꽃잎의 떨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온 몸의 감각을 열어놓고 집중하자.

기회의 육체, 육체의 기회를 소중하게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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