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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행복한 청소부

  

 나의 인생길 반 고비에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처했던 중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은 호텔 지하였다. 누구에게나 설명하기 힘든 추락이 있다는 것으로 전후 맥락의 설명은 생략하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그렇듯이 ‘어느 날 갑자기’ 호텔 객실을 정비하는 룸 메이드로 일하게 되었다. 

 메이드 일은 일반 청소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베드메이킹(bed making)을 비롯한 모든 일을 배우고 익히는 데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담당 멘토가 있어서 그 선배를 따라 다니면서 한동안 기술을 숙지한 다음 독립적으로 룸 정비를 할 수 있게 되면 처음에 방 하나부터 시작해서 둘, 셋, 넷… 개수를 늘려간다. 

 내가 일했던 호텔은 하루에 방 11개를 정비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 기본에 준하여 정해진 급여가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처음에 방 서너 개를 할 때는 힘은 들지만 선배들도 잘 대해주고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나름 재미도 있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일곱 개, 여덟 개를 할 때에 고비가 찾아온다. 정해진 시간 내에 처리해야 되는데 서너 개 할 때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몸은 힘들어도 시간 적으로 크게 쫒기지 않지만 일곱, 여덟 개를 할 때는 속도 조절을 잘 못해서 늦어지게 되면 육체적인 힘든 것에다 심리적인 압박 까지 더해져서 몹시 힘들게 여겨진다. 게다가 선배들의 엄격한 교육이 이 때 제일 심해지기 때문에 그 때를 못 넘기고 나가는 신입들도 절반 정도는 된다. 이 시기를 넘기고 아홉 개, 열 개를 하게 되면 온 근골격계가 격렬하게 저항한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이 일 아니면 할 일이 없나?’

 ‘뭐가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가?’

 ‘언제 이 일을 그만둘 건가?’ 

 누군가에 의해 잡혀 와서 강제로 하는 일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내가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일인데, 온갖 흉흉한 생각으로 괴로워진다. 괴로운 마음은 몸을 힘들게 하고 그러면 힘든 일이 더 힘들게 느껴지므로 몸이 덜 힘들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돈 귀한 것도 막연하게 알았던 것에서 최소 단위로 쪼개져서 밑바닥부터 다시 알게 되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증폭되는 값진 수업이었다.


 


 처음에 들어올 때,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지만’ 사정이 있어서 잠깐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신경숙의 소설『외딴방』에서 이해도 안 되는 책 헤겔을 펴놓고 있는 ‘헤겔을 읽는 아이’가 나오는데, 그곳에서의 내가 ‘헤겔을 읽는 아이’였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만 내가 너희들과 다른 것 같아. 나는 너희들이 싫어.”

 외딴방의 여공 미서처럼 마음속으로 말했다. 

 열한 개 기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때는 열한 개 기본을 매일 하고 헐떡이지도 않고 차분한 호흡으로 퇴근하는 선배들에게서 후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열한 개를 정비해내고 정직원이 되면서 바깥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묘한 자부심이 생겼다. 이런 느낌이 해병대가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할 그들만의 특별한 자부심. 나는 진심으로 그 곳의 선배들이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동료들이 든든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한 달을 버티기도 힘겨운 일을 십년씩 해내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서 의미를 찾으나 못 찾으나 여기서 일하는 동안만큼은 나도 그들처럼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살아보기로 다짐했다. 


 나는 그 곳에서의 일을 ‘시지프스 ROOM11’ 이라고 명명했다. 이 일이 익숙해질 때 까지 매일 방 열한 개를 청소하는 일은 나에게 시지프가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처럼 가혹하게 여겨졌다. 

시지프는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고 굴러 떨어져서 원점으로 되돌아간 바위를 다시 굴려올리는 힘겨운 형벌을 받았다. 시지프는 고통스러워하거나 멈추지 않고 그 일을 계속한다. 제우스 신이 시지프에게 '왜 아무런 성과가 없는데도 돌을 밀고 있는가?' 라고 묻자 시지프가 대답한다. '나는 이 돌을 밀어 올린 결과가 아니라, 이 돌을 미는 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시지프는 그 큰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면서, 자기에게 형벌을 내린 그 신들은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어떤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 획득이다' 라고 한다. 카뮈는 부조리와 직면한 뒤 모순을 해소하려 애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생을 긍정하는 태도’를 갖는다. 그가 정상에 돌을 밀어올린 후 펼쳐진 아래의 풍경을 바라볼 때 환희의 순간이 바로 시지프 삶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잠시라도 '존재하는 그 순간' 에 인간의 존재 가치가 확인된다고 말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삶의 주도권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는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로 아름답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의 신화 마지막 문장이다.

 프로젝트, ‘시지프스 ROOM11’ 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 속에서도 존재 자체를 기쁨으로 생각하겠다는 결의였다.




 그렇지만 육체적, 정신적 힘듦에서 오는 갈등과 질문은 일을 그만 두는 날 까지 지속되었다. 그 질문들을 스캐쥴 표 뒷면에 이면지를 끼워서 스스로 삶에 대해 질문한 것에 대해 떠오르는 답이나 생각들을 메모했다. 그 짧은 메모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바쁜 날들이 더 많았고 그럴수록 메모에 대한 의지는 강해졌다. 좀 더 적응이 되고는 열한 개 기본을 다 하고도 정해진 시간 보다 빨리 마쳐지는 날도 생겼다. 그런 날은 그동안 메모한 이면지들을 묶어서 작은 수첩으로 만들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스캐쥴러와 친해지고 사무실에 드나들기도 하면서 이면지를 묶음으로 사용해서 작은 수첩 보다 더 크고 두꺼운 노트를 만들기도 했다. 글을 쓰는 것도 좋았지만 글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종이를 묶고 있다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느꼈다. 글을 쓰고 종이를 묶을 때면 ‘어디로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방향이 느껴졌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서랍 안에 빨간 성경책이 있었다. 고객을 위한 기본 비품 중 하나였고, 정비할 때 마다 서랍을 열어서 왼쪽 아래 바른 위치에 세팅하는 것이 성경책에 대한 나의 임무였다. 서랍을 열 때 마다 성경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덜 바쁜 날에 한번은 뭔가를 훔치는 듯한 갈급한 마음으로 성경책을 펴서 한 구절 씩 읽었다. 말씀을 읽은 날은 뭘 훔쳐 먹어서 배가 안고픈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이 말씀은 바쁜 상황 속에서도 쪼그리고 앉아서 필사한 것이고, 그 때는 그저 마음에 와닿아서 급하게 베껴적은 것이었는데 이후에 나의 소명을 발견하는데 명상자료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 




 플라톤은 ‘본다’고 하는 것은, 눈 속에서 일종의 팔과 같은 것이 사물에 까지 뻗어나가는 행위가 읽기이며, 보는 행위는 이 일에 기초한다고 했다. 눈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는 감각적인 수단에 의해서는 인식할 수 없지만 플라톤이 그 촉수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초감각적인 세계를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이 보는 행위는 자신의 눈에서 에테르체(생명체)의 힘을 내 보내, 대상을 붙잡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책을 고르고 단어를 붙잡은 그 갈급한 경험들은 ‘보는 것’, ‘보이는 것’, ‘보여지는 것’에 대한 직관의 힘을 무엇보다 잘 설명해주는 경험이 되었다. 

 매일 열한 개의 방을 청소하는 일에 시지프 신화를 대입시키고, 피곤한 육체에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이해가 안가는 헤겔을 읽고, 스캐쥴 표 뒷면에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성경을 뒤적였던 그 모든 행위의 밑바닥에는 뿌리 깊은 불안이 있었다. 

 인생길 반 고비에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처했던 중 가장 깊고 어두운 곳, 호텔 지하는 그 동안 회피해왔던 깊은 불안과 대면한 통과의례의 시간이었다.


 ‘깊은 실존적 불안을 가진 현대인이 회복해야 할 근원적인 힘은 고대인들의 영적인 지평 안에 우리를 위치시킴으로서, 이른바 ‘원시감정’을 일깨움으로써 새롭게 할 수 있다. 

 단테가 신곡에 기록했던 인생길 반 고비에 길을 잃는 것, 어두운 숲에 처한 상황에 대해 현대인들은 직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존적 불안의 실체를 고대인들은 알고 있었다. 

불안은 그들의 근원적인 경험, 즉 그들로 하여금 성숙하고,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부추긴 결정적인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초월하고 어머니와 어린이의 모든 콤플렉스로부터 지유로웠던 성숙하고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인간이었다. 역으로 그 실존적 불안의 실체를 직관적으로 감지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의존하거나 스스로 만들어낸 작위적 계략으로 행동하는 현대인은 자유롭지 못하고 미숙하고 현명치 못하고 책임감 없음으로 인해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처하게 된다. 

 현대인은 존재적 곤경에 처했을 때 암흑, 죽음, 무 이외의 어떤 출구도 보지 못한다. 고대인은 이같은 상황, 즉 지독한 불안의 경험을 새로운 인간 탄생의 필수 조건으로 보았다.

 죽음과 맞먹는 고통과 부활은 새로운 힘으로 태어나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불안에는 부활이 뒤따르고, 성인으로서의 성숙한 책임감이라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 『신화. 꿈.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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