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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꿀벌의 세계

 

 독창적인 생태학자 야콥 폰 윅스킬은『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에서 동물과 환경의 관계에서 각 동물마다의 주관적으로 성립되는 움벨트 (Umwlet): 환경세계 개념을 말한다. 

 윅스퀼은 동물 주체가 자신의 환경에 있어서 사물과 맺고 있는 관계는 인간이 생각하는 시공간이 개념이 아니며 그것은 인간의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동물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세계를 갖는 하나의 주체로 바라본다. 생명과학에 있어서 모든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폐기하고 자연 이미지의 근본적인 탈 인간화를 시도한다. 인간 중심적 사유에 갇혀 있는 인간은 자신이 보는 세계가 모든 동물들에 대해서도 동일하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와 동물들의 여러 세계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들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생물학에서 두 가지 해명적 태도를 비판한다. 하나는 자연을 오로지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에 인간학적인 의미를 투여하는 태도이다. 인간의 시각과 의식으로 투사했을 뿐, 모든 생명 존재들에게 등질적인 공간과 시간은 실존하지 않으며, 모든 환경은 그 자체 안에 '닫힌 통일체'라는 점을 개별 생물들의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윅스퀼은 진드기, 지렁이, 해파리, 짚신벌레, 성게, 메뚜기, 갈가마귀, 꿀벌... 등 작디 작은 생명체들을 연구하고 그 "미지의 세계들로 향한 짧은 여행(excursion in unknowable world)"기를 흥미롭고 경이롭게, 동화처럼 아름답게 들려준다.

 이 작은 생명체들은 각자의 주위에 일종의 거품집을 구축하는데 이 거품집은 그 작은 짐승들의 환경 체계를 표현하고, 각 주체에 대해 민감한 모든 특징들로 가득 채운다. 작은 동물 관찰기를 들여다보면서 사람을 생각한다. 누구나 각기 자신만의 지각에 따른 각자의 시공간에서 자신만의 공기 속에서, 자신만의 진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 대해서.


 윅스퀼은 꿀벌의 환경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소개한다. 꿀벌들이 활짝 핀 꽃들과 꽃봉오리들이 만발한 초원에서 하는 행동을 관찰했을 때, 꿀벌들은 꽃봉오리는 피하고 활짝 핀 꽃들 위에 내려앉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활짝 핀 꽃은 그 형태에 따라 별과 십자가와 같은 단순한 형으로 대체시키고 꽃봉오리는 원으로 볼 때, 별과 십자가는 열린 형태가 되고, 원은 닫힌 형태가 된다. 꿀벌은 본능적인 욕구와 필요에 따라 열린 형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꿀벌의 이러한 특징에 관한 생물학적 의미, 즉 봉오리가 아니라 꽃들만이 꿀벌에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형태의 문제를 간단한 상징적 기호로 축소시킨 이 연구에 따르면 지각 기관에서 기호들을 지각하는 세포들이 두 집단으로 분리되며, 그 중 하나는 ‘열린’ 도식을 따르고 다른 하나는 ‘닫힌’ 도식을 따른다는 가정이다. 꿀벌들이 지각하는 이미지들은 색깔과 향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환경세계가 의미의 상징들만을 포함하며 주체의 모든 의미의 상징이 그 주체의 형태 발생과 발달에서의 의미의 모티브라는 것이다. 

 그는 꽃의 구조와 꿀벌의 구조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

꽃이 꿀벌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꿀벌이 꽃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저들은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윅스퀼이 창안한 움벨트(환경세계)는 동물 관찰 실험을 통해 발견한 개념이지만 각각의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주변환경(감정, 감각, 지각)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데 영감을 주었다.

 윅스퀼의 움벨트에서 심리학자, 프랜시스 터스틴이 발견한 '자폐캡슐'을 연상할 수 있었는데, '자폐캡슐이란, 자폐 아동이 마치 단단한 껍질과 같은 신체적 덮개를 갖고 있다는 망상을 만들어내어 취약한 자기를 보호하려는 정신기제를 말한다. 

 이는 스스로 '투쟁'할 자원이 없는 수동적인 사람이 외부의 침입감정에 맞서지 못하고 쉽게 움츠러들어 거북이가 머리를 몸통 안으로 숨기듯이 자신이 만들어낸 껍질 속으로 들어가는 지나치게 강렬한 도피 반응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은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동료환자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라는 말로 모든 인간의 존재적 자폐 상태를 지적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구라도 결국에는 어느 정도의 절망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동요, 당황, 불화,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에 머무르려하지 않는 요소가 있고, 그런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요소도 있다. 인간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혼의 질병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된다. 이 영혼의 질병은 아주 드물게만, 어렴풋하게만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통해서만 자체를 드러낸다.’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윌튼 아카데미는 부모들이 앞 다투어 자식을 보내려고 하는 학교다. 아이비리그 합격자 순위에서 늘 최 상위권을 기록하는 미국 최고의 명문 학교로 이 학교 출신들의 대부분이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 졸업 후에는 의사, 변호사, 교수, 정치가 등 미국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온갖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주인공, 닐 페리의 아버지는 자식을 비싼 사립학교에 보낼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지만 아들을 의사로 만들겠다는 욕심에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며 지원하고 있다. 닐은 아버지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아버지의 모든 말에 무조건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새로 부임해온 존 키팅 선생님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졸업생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라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시에 대한 비평 이론 부분을 책에서 찢어버리게 하고, 책상 위에 뛰어올라가 세상을 다르게 보라고 가르친다. 연일 계속되는 파격적인 행보는 학생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던 학생들은 존 키팅 선생을 만난 후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욕구를 바라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단 한 번도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했던 닐은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연극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알아낸다. 그리고 오디션을 보고 주연을 따낸다. 그러나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연극을 한 것을 들키게 된 닐은 아버지에 의해 학교를 그만두고 강제로 사관학교에 보내지게 되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닐은 결국 자살하게 된다. 

 처음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한없이 기뻐하던 닐은 그렇게 허무하게 짧은 생을 마감한다. 자살하기 전, 아버지의 완강한 태도를 이기지 못한 닐이 마지막으로 힘없이 하는 대사는 “Nothing”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상에서 존재적 자폐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는 ‘무(無, nothingness)’이다.

 자신이 무화(無化)되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다 필요 없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나 자신이 먼지 같이 느껴져.”

 “해봤자 안 될 거야.” 

 “나 하나쯤 없어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거야.”

 이런 자폐적 표현들은 그 자신이 ‘무(無, nothingness)’에 의해 공격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대로 된 돌봄과 치유, 회복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경우, 외부적 조건이 좋아서 상황이 잘 풀릴 때는 기능을 잘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거북이처럼 자신이 만든 자폐의 껍질로 깊숙이 들어가는, 고립의 상태를 만든다.

 프랜시스 더스틴은 『자폐아동을 위한 심리치료』에서 자폐 아동의 무효화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의지를 가졌으나 생생한 존재감과 확신과 즐거움을 갖지 못한 우울한 어머니에게서 돌봄을 받는 것이 그들의 ‘무(無, nothingness)’의 느낌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어릴수록 아기의 전적인 환경인 어머니의 감정이 아기의 세계가 된다. 어머니의 주된 정서가  우울할 경우, 아기가 경험하는 세상은 먹구름이 낀 회색 하늘처럼 흐리고 어둡게 설정된다.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어머니의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이 동기가 되어 좋은 먹거리나 좋은 교육을 찾고, 나아가서 집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이에게 해준 것 중 가장 좋은 선물은 ‘좋은 교육’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그 보다 더 좋은 선물은 어머니의 좋은 감정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자폐성향을 가지고 있다. 소통, 사회적 상호작용, 제한된 관심과 행동 등의 범주에서 병적인 소인을 보이는 중증인가, 사회 생활하는데 큰 무리가 없이 경미한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자폐적인 경향성이 있다. 그러기에 생각대로 막힘없이 쭉쭉 성장해 나가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힘을 내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이지만 비유적으로 사람을 집이고, 감각에 해당하는 자폐캡슐을 유리창이라고 했을 때 비교적 투명하고 깨끗하게 닦여진 유리의 경우는 바깥 풍경이 있는 그대로 잘 보이지만 깨끗이 안 닦이고 어두운 창은 밖의 사물이 왜곡되어 보이듯이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렇게 감각의 창을 깨끗이 닦는 것으로 왜곡되지 않게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존재가 처한 곤경'인 자폐캡슐은 일상용어로 '나쁜 습관'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인 생후 직후부터, 더 나아가 태내 상황부터 시작해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형성된 주변환경으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야만 했던 '나쁜 습관'이 있다. 너무나 오래되고 고태적인 공기라 의식하기 어렵고 따라서 고치기 어렵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안 되는 육체의 힘겨움은 바로 이 '자폐캡슐' 즉, '나쁜 습관'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나를 정체시키고 매몰시키는 '나쁜 습관'을 건강과 성장을 향하는 '좋은 습관'으로 대체시키는 것으로 나의 환경 세계를 새롭게 조성해 나가야 한다. 


 불교 심리학에서 말하는 '종자식'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때 종자란 씨앗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태어남 자체가 고통이라고 하며, 이 생에서 모든 업장을 소멸하고 해탈을 한다할지라도 잠재태로서의 부정적인 업식의 씨앗이 불씨처럼 남아있어 어떤 상황에서 조건이 갖추어질 때, 그것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심리학에서 '그릿'이라는 개념이 있다.

 grit 단어 자체의 뜻은 모래나 아주 작은 돌을 말한다.

 '그릿'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앤젤라 더크워스가 개념화한 용어로, 성공과 성취를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투지 또는 용기를 뜻한다. 즉, 재능보다는 노력의 힘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어떤 영역에서든지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가장 큰 요인은 지능도, 성격도, 경제적 수준도, 외모도 아닌 바로 ‘그릿’grit이었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 

‘불굴의 의지’, ‘투지’, ‘집념’ 등으로 번역되는 그릿은
‘열정이 있는 끈기’ 즉,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정진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앤젤라는 수많은 사례와 데이터를 통해 성공을 '끝까지 해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의 완성은 '그릿'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씨앗으로서의 잠재태와 같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정진할 수 있는 힘, 그릿 또한 함께 작용함으로써 그 불길 속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심인성 자폐의 특징 중의 하나가 부정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다. 아무 것도 아닌 텅빈 블랙홀과 같은 감정 속으로 모든 것들이 다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동안 자신이 애써서 해온 노력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처럼 공허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바로 자폐적인 감정이며, 일종의 병인 것이다. 그 감정이 실재가 아닌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알고 자존하는 '내면이 강한 사람'이 될 때 환상의 감정은 더 이상 우리의 현실에 개입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감정은 위험하다.

어떤, 구체적인 것에 촛점을 맞추어 그릿의 상태로 돌아서야 한다.

이를테면 두 발이 땅에 굳건하게 닿는 감각이랄까,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에 닿는 느낌이랄까, 새로 연 가게에서 새 메뉴를 시켜본다든가, 시트러스 향 샴푸로 바꿔 본다든가... 뭐든 좋다. 그리고, 새로운 감각으로 나의 소중한 모래알, 아주 작은 돌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과 축구를 하는 모습이다. 학생들은 공을 차면서 키팅 선생님이 나누어주신 쪽지에 적힌 내용을 큰 소리로 외친다. 

“승산 없는 싸움에 도전, 겁 없는 적을 상대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항구를 구경할 선원이 되기 위하여”
“내 인생의 노예가 아닌 지배자가 되기 위하여”
“총구 앞에서도 태연하게 전진할 수 있기 위하여”
“춤추고 손뼉 치며 기쁘게 뛰고 소리치고 떠다니기 위하여”
“지금부터 새롭고 즐거운 시와 인생을 갖기 위하여”
“참된 시인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위하여’ 힘차게 달리고 큰 소리를 외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위하여’ 가만히 멈추고 조용히 침묵할 것인가.

 나의 꽃은 무엇이고, 나의 꿀벌은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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