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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순간에 사는 아이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 전서 13:11

     

 무의식에는 시간 개념이 없다. 따라서 어린 시절의 사건을 마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로 착각한다. 외부 환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 무조건적인 허용과 수용을 경험해야할 시기에 자신의 욕구를 거절당한 경험이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었던 경험 등이 해소되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 보다 강하게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어릴 적 느꼈던 권위체로 착각을 하게 되어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에 대한 비굴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비굴한 자신이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불안 상태는 현실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연출하게 함으로써 성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정상적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어린 시절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한 것이 체증처럼 마음속에 남아있게 되고, 현실에서 만나지는 상황을 통해 그 어려움이 재현된다. 이것이 신경증이다. 

 많은 학자들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인가 불가능할 정도인가의 차이이지 현대인은 모두 신경증에 걸린 상태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동료 환자’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고 말했으며, 오쇼 라즈니쉬는 우리 안의 내면 아이의 평균 연령이 13세라는 구체적인 나이를 제시하기도 했다. 

 ‘신경증 환자’는 성장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마음속의 아이’의 다른 이름이다.

 ‘길은 귀로 이루어져있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이야기들을 길에서 들은 것이다.




감추고 싶은 것들이 많은 아이

J는 삶에서 감추고 싶은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주 어릴 때, 부모와 집이 커 보이고 무조건적으로 좋게 보일 때가 지나고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친구들과 비교가 되기 시작하고, 부모의 학력이나 직업 같은 구체적인 이력부터 시작해서 외모를 가꾸지 않은 엄마를 친구들이 보는 것도 부끄러웠고, 셔터를 내리는 구조로 되어있는 집조차도 부끄러웠다. 감성적으로 예민한 중, 고등학교 시절 몸이 아팠던 엄마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도시락도 부끄러웠고, 마땅히 좋아해야 할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신이 싫었다. 

 그런 J가 성인이 되어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자신보다 우월한 조건을 가졌었다. 부모의 직업이나 학력이 훌륭하고 부자인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걸 알고 사귄 것은 아니지만 친해지고 나서 보면 그런 경우가 많아서 그 때는 신기했고 복이려니 했지만, 그런 풍요로운 외부 조건은 자신의 결핍에 대한 투사가 끌어당긴 에너지였다. 자신이 못 가진 것을 대리 충족하기 위해 한 의존에 대한 댓가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당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재능을 이용당했다는 것 역시 자신의 무의식적 투사가 그들의 좋은 조건을 이용하려고 한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꽤 오랜 시간 쳇바퀴 돌듯이 이 프로그램대로 살았다. 프로그램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어쩌면 평생 동안 깨닫지 못하고 꿈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이 갖지 못한 결핍을 가진 또 다른 상을 찾아 헤매고 의존하고 이용하려하고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는 환상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 소모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끔찍한 도돌이표 구간을 반복했을 것이다. 

 지금의 J는 그런 면에서 당당하다. 자신이 갖지 못했거나 부족함이 떠벌릴만한 자랑스러움도 아니지만 부끄러워하고 숨길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외부 환경들은 모두 자신 안에 있는 에너지의 다른 모습임을 깨달은 J는 그 갈망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아이가 아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노력으로 현실에서 만들어나가면 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건강한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없는 3세 미만의 아기나 치매에 걸려 자기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노인, 자아가 없는 자폐 상태가 아니라면,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 어둠을 덮고 감추어서 마냥 밝고 긍정적인 사람인 척 하는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바퀴벌레가 무서워서 안 보려고 어둡게 해놓으면 그 어둠속에서 계속 증식하지만 빛을 비추어 찾아낼 때 없앨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감추고 싶은 부분에 빛을 비추어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용기로 부터 그것이 감추어야 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로 부터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그 새로운 힘으로만이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진정한 치유와 성장은 그렇게 시작된다.

우리의 어둠에 빛을 비추시어 어둠이 드러나기를, 

그리하여 이끼가 걷힌 곳에 연둣빛 새싹이 돋기를.


국수를 잘 먹는 아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어느 날, 식구들과 식구가 아닌 사람들과 둘러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다. 배가 불러서 그만 먹으려는 찰나에 엄마가 

 “우리 H는 국수를 참 좋아해요.”

 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고, 그만 먹을 수가 없어서 배가 부른대도 계속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번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 H는 국수를 참 잘 먹는다.”

 고 칭찬처럼 말을 했고, ‘국수를 잘 먹는 아이’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싶어서 그만 먹고 싶은 대도 많은 양의 국수를 계속 먹게 되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참고 먹다보니 먹을 만하게 되었고, 국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 날은 미역국이 나왔는데 미역국 안에 하얗고 동그란 떡이 들어있었다. 엄마는 그걸 새알심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새알 같았다. 숟가락으로 하나 떠서 먹어보았는데, 매끌매끌하고 쫄깃한 동그란 하얀 떡이 짭조름한 미역국 국물과 어우러져서 어찌나 맛있던지 나머지 새알심은 아껴먹으려고 그릇 한쪽 구석에 몰아두었다. 밥을 다 먹고 새알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엄마가 

“우리 H는 새알심을 별로 안 좋아하나봐.”

하면서 그릇을 치워버렸다. H는 몹시 당황했지만 먹을 거라는 말이 입 밖으로 빨리 나오지 않았고, 아끼던 새알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답답해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하지. 말하면 될 일을 그 말도 못해서 그걸 뺏기고 억울해하냐?”

 알지만 H는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말하지 못하는 답답한 증상이 생겼다. 

 어릴 때부터 생긴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어서 선택 장애로 나타났다. 사람들과 까페나 음식점에 가면 다른 사람들이 다 고르고 항상 마지막 까지 남게 되었다. 모든 메뉴를 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고민과 갈등을 하다가 결국 제일 기본인 아메리카노나 녹차를 주문했다. 그곳이 중국집이라면 처음 보는 진귀한 요리까지 모두 다 검토한 후에 결론은 짜장면이나 짬뽕이었다. 혼자라면 상관없는데 상대방이 있을 경우에 빨리 정하지 못함으로써 지체되는 시간에 대한 부담이나 미안함 까지 추가되어 에너지를 고갈시켰다. 역시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안되는 게 문제였다. 

 때때로 ‘오늘은 무조건 내가 1등으로 고르겠다.’ 고 결심을 하고 당당하게 먼저 고르기도 했다. 그런 의식을 할 때는 개선된 것 같았지만 의식을 놓쳐버리면 습관처럼 다시 답답한 상태로 돌아갔다. 이 답답한 증상은 단지 메뉴를 고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상다반사의 모든 면에서 적용되었다. 직장에서도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에 즉각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그 때 그렇게 말할 걸….’, ‘이렇게 말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하곤 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안되는 게 있고, 그게 H가 가진 문제고 병이고 아픔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결함은 성격발달 과정을 거치는 동안의 유년기의 잘못된 경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기저귀를 갈고, 배변을 조절하는 항문기에 아이들은 처음으로 자신이 신체를 조절할 수 있는 자율성을 시험하고 기뻐한다.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 과정에서 어머니의 훈련 방법이나 태도가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어머니가 자신의 성격을 조절하지 못하고 성급하고 엄격하게 훈련시키면 강박적인 성격이 되어 스스로 알아서 배설욕구를 조절하는데 필요한 신경의 성숙을 방해한다. 항문기 경험을 통해서 자기조절력, 독립심, 자율성, 자존감, 수치심, 혐오감 등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주요 인격이 만들어진다. 항문기의 고착은 어른이 된 후에도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양가감정과 선택 장애, 강박 신경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이 된 것처럼 온 몸이 녹아버릴 것 같다던 열이 많은 H, 이제 까페에서 제일 비싼 메뉴를 1등으로 주문할 수 있는 H, 자기 문제를 분명히 볼 수 있게 된 그녀에게 국수 대신 냉면을 추천한다. 


구김살 없이 늘 웃는 K의 구김살

 K는 어디든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상을 가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든 오랜 시간 같이 있는 동료에게든 어색함이 없는 밝은 표정과 배려와 친절을 베푸는 행동으로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런 K는 함께 하고 싶은 동료 1위, 부모들이 면담을 하고 싶은 교사 1위였고, K의 이름이 생각이 안날 때 사람들은 종종 ‘늘 웃는 사람’이라고 하면 통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던 K에 대한 표층을 이루고 있는 주된 인상은 그 이면을 떠받치고 있는 심층을 이해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가두는 벽, 당연히 무너져야 할 벽이었다.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밝기만한 웃음은 자신을 보호할 마땅한 무기가 없는 어린 시절, 너무 일찍 보호막을 상실했던 그녀가 생존을 위해 자생적으로 계발했던 방어 기제였다. 자신의 가짜 웃음에 대해 고백하면서 그녀는 밝은 웃음만큼 어둡고 슬프게 울었다. 태양이 지고 밝음이 쉬는 동안 어둠이 밤을 지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밤에도 어둠 대신 밝음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힘으로 버텼으니 참다못한 티 없는 웃음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함께하고 싶어 했던 부지런함, 빈틈없는 성실함, 정확함을 유지하기 위해 들숨에 들숨을 거듭한 K에게 날숨의 평온은 없었다. 일을 시작하면 끝날 때 까지 잠시의 쉼도 없이 달리는 근무 태도는 타인을 만족시키는 대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을 실추시키고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가중시켰다. 어린 자녀와 남편과 함께 마냥 행복해야할 가정의 조건을 갖추고도 육아와 가사 일을 하면서 무언가에 쫒기는 듯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왜곡된 시간 감각과 해치우듯이 일을 하는 불안 상태는 ‘지금 여기‘의 행복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막과 같이 작용하고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이 육체는 자랐으나 어린 시절 치유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 즉 마음 속의 어린아이가 느끼는 고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까봐 자신의 욕구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던 K, 너무 오랫동안 타인의 시선을 생각하고 타인의 욕구에 충실하다보니 세상의 일을 대체로 잘 하게된 K, 그럼으로써 세상의 요구가 더 많아지고 정작 자기 자신의 욕구가 뭔지 잊어버리게 된 K,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K는 다른 사람 보다 훨씬 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했다. 어린 시절, 부모도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사고와 트라우마가 지금 이 순간의 삶과 행복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크든 아무리 힘들든 성인이 된 자신이 이해하고 보듬고 책임져야 하는 자신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모든 것을 다 좋아하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구김살 없는 웃음을 가진 K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진실하게 들여다보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면서 마음의 구김살을 다림질하는 법을 깨달으며 진짜 스마일을 알아가고 있다.

K를 위한 힐링송으로 노브레인의 ‘10분간 휴식’을 추천한다.

‘나 이렇게 바닥에 누워 붉어진 하늘을 바라보고

잊혀진 아픔과 감춰진 모든 것들

나 이렇게 바닥에 누워 어두운 별빛을 바라보고

시든 내 마음과 뒤섞인 모든 것들

이젠 내 모든 것들도 싸늘히 식어가고

우린 아픔을 잊으려 이 노랠 부른다네‘




어린이와 깨달은 자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 참 재미있는 아이들만의 특성을 경험하곤 했다.

그 중 하나로 ‘현재에 있는 특징’은 늘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히는 성인이 배우고 닮아가야 할 귀한 능력이다.

페인팅을 하는 날이었다. 요정처럼 사뿐 사뿐 스키핑 스텝으로 뛰어다니던 4살 지우가 "나도 할래요." 하고 왔다.

물을 사용하는 습식 수채화를 지도할 때는 너무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그리도록 허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제한된 아이들이 마치고 나서 그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놀다가 와." 하고는 5분도 안되어서 "지우야, 이제 그림 그리자." 하니까 벌써 친구들 틈에 섞여서 놀이에 몰입해서는 "이제 안 할래요." 한다.

바느질 시간이었다. 빨강을 좋아하는 일곱 살 민아가 오면 말하지 않고도 빨강 실을 끼워둔 바늘을 건넨다. 열이면 열 “빨강 주세요.“ 하기 때문이다. 그 날도 빨강 실을 끼운 바늘을 주자 “파랑 할래요.” 한다.

‘왠일이지?’ 의외라는 생각과 함께 준비되지 않은 파랑 실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한 가지에만 고착되어 있는 기호가 바뀐 것에 반가운 마음으로 파랑 실은 끼운 바늘을 건냈다. 파랑으로 두어 번 홈질을 하던 민아가 다시 빨강색 실로 바꿔달란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이 없고 자신의 욕구(ID)가 우선인 아이에 비해 판단력과 이성이 발달한 어른들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 마음이 바뀌어도 쉽게 옮겨가지 못한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초자아(super ego) 검열을 자체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주변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만 내세워서도 안 되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바뀌었는데도 책임감이라는 가치에 눌려져서 억지로 참는 것도 옳지 않다. 두 힘의 균형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이제 안 할래요.’, ‘마음이 바뀌었어요.’의 솔직함이 그리운 것은 책임감을 내세우며 생기 없는 가짜 감정으로 함께하는 것 보다 부딪히고 싸우더라도 진짜 감정이 풍성한 세상에서 생명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하리쉬는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어린이와 깨달은 사람은 흡사하다.

어린이들은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만 그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 버리면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황이 어린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지도 않으며 어린이들이 그 상황에 의해서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깨달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어린이였던 우리는 자라면서 처리되지 못한 갖가지 과거에 대한 괴로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더 이상 현재에 있지 못한다. 너무나 자주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분열되기 때문에 늘 바쁘고 늘 피곤하다.

 불교의 수많은 지옥세계 중 하나인 아귀계에 존재하는 귀신은 목구멍이 연필처럼 좁아서 음식을 먹어도 늘 배가 고프기 때문에 늘 갈증과 배고픔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현재에 만족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늘 불만족스러운 상태의 상징적인 존재인 것이다. 

 지나간 것을 흘려보낼 수 있고 다가올 것을 걱정하지 않으며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는 능력자, 어린이를 닮아가기 위해 그동안 짊어져왔던 불필요한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자.

Let it go, Let it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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