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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전나무와 기러기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 즈음에 책장에서 무심코 안데르센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꺼내서 읽은 적이 있었다. 단편 이야기 몇 편으로 엮어진 책으로 각각의 이야기 첫 부분을 조금씩 읽으면서 넘기고 있었는데, <전나무 이야기>를 읽다가 감정이입이 되어서 단숨에 읽었다.

 숲 속에 작고 예쁜 전나무가 있었다. 어린 전나무는 키 큰 나무가 되어 멀리까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새가 찾아와 둥지를 틀 수 있게 아름드리 나무로 자랄 수 있기를 늘 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나무는 커다란 나무들이 밑둥이 잘려 수레에 실려 가는 것을 보게 된다. 황새와 제비, 참새가 와서 전나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나무들은 커다란 배의 돛이 되어 여행을 하거나 반짝이는 예쁜 장식들과 수백 개의 촛불로 장식을 하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된다는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린 전나무는 '나도 넓은 바다를 누비고 다니기를, 나도 화려하게 꾸미고 따뜻한 거실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꿈을 꾼다. 눈이 쌓인 추운 숲속에서 외롭게 서있으면서도 꿈이 생긴 전나무는 행복했다. 드디어 작은 전나무도 밑둥이 잘려 실려가게 된다. 몸통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견뎠고, 큰 배에 실려서 비바람이 부는 망망대해를 건너는 동안도 행복한 꿈이 곧 실현된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드디어 작은 아이들이 있는 따뜻한 집에 도착한 전나무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대로 예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가 된다. 아이들이 작은 손으로 예쁘게 장식해주고 자신의 주변을 돌면서 웃음이 끊이지 않을 때 전나무는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크리스마스가 지나자마자 따뜻한 촛불도 꺼지고 예쁜 장식들도 떨어져나갔다. 장식이 떨어져나간 전나무는 어두컴컴한 창고에 던져졌다. 전나무는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곧 자기를 찾을 거라고, 때가 되면 또 다시 따뜻한 거실에서 사랑받을 기회가 올 거라고 기대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고, 오랜 시간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창고에 있었던 전나무는 곧 시들고 누렇게 변해버렸고, 마침내 장작이 되어 불에 던져지고 활활 타고 만다.

 전나무의 바램대로 다시 화려하게 꾸며져서 사람들 속에서 사랑받는 장면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 아팠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지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 성인인 나의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너무하잖아요. 어린 전나무가 뭘 잘못했다고…. 오랜 추위와 아픔 속에서도 늘 꿈꾸고 갈망했던 전나무의 결말이 너무 가혹하잖아요. 이건 아니잖아!”

 외쳐봤자 마음만 아프고 목만 아프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안데르센의 마지막 냉정한 결말,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지요..'를 더 이상 징징대고 원망하지 않고, 동의하고 감사하면서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성장이다.

 안데르센은 옳았다. 그의 말대로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안데르센은 작은 전나무의 죽음을 통해 가장 빛나는 순간에도 삶을 즐기지 못하고 늘 갈망 속에 살다가 늙고 노쇠해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어리석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나무 이야기의 키에르케고르 버전으로 <기러기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 또한 편안하게 기대어 있던 몸의 자세를 곧추 세우게 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한 떼의 기러기가 남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날이 저물어 한 들판에 내려 앉아 하루를 쉬게 되었다. 다음날 날이 밝아 모두 떠날 준비를 하는데 한 기러기가 주위를 살펴보니 추수 직후라 먹을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기러기는 무리를 따라가지 않고 하루만 더 묵으면서 곡식을 먹고 힘을 차려서 날아가려고 마음을 먹는다. 거위들은 주인이 주는 모이를 먹고 날짐승들의 위협으로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이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아닌가. 거위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기러기는 대장 기러기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 하며 내일은 힘을 내서 날아가 조만간 무리와 합류하겠다고 말한다. 대열에서 이탈한 거위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무리는 떠나가고 혼자 남아 너른 들판의 낱알곡식을 혼자 여유롭게 먹고 하루를 지낸 기러기는 추위를 피해 힘들게 날아갈 필요도 없이 아무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았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먹을 걱정을 하지 않고 보낸 기러기는 그 다음날이 되자 고민에 빠진다.
 ‘그래, 오늘 하루만 더 먹고 내일은 더 빨리 날아서 무리들과 합류해야지.‘ 
  그래서 그날도 먹이가 풍부한 너른 들판을 여유롭게 노닐며 곡식을 주어먹고 지냈다.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다가 결국 겨울이 오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 푸른 창공에 기러기 떼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난 기러기야. 여기서 편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하늘을 날 때의 상쾌한 기분과 자유로움이 그리워. 자, 이제 날아가 보자.’

 기러기는 날려고 날개를 움직여보았지만 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날지를 않아 날개에 기름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기러기는 거위들을 향해 자기처럼 거위들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위들은 도리어 기러기를 향해 날지도 못하면서 말만하는 뜬 구름 잡는 몽상가라고 비난했다. 쉽고 편안함에 안주해버린 기러기는 끝내 기러기의 본성을 잃고 거위보다 못한 존재로 비난받으며 거위들 틈에 살게 된다. 결국 거위들에게 동화된 기러기는 날기를 포기하고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기러기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하늘 날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부여받은 기능이 퇴화되어 날지 못하게 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위는 절대 기러기가 될 수 없으나, 기러기는 곧잘 거위가 돼 버린다. 경계하라!”




 음악에서 코다(Coda)라는 개념이 있다. 코다란, 악장의 끝에 위치하여 만족스러운 종결의 느낌을 주는 부분을 말한다. 구조가 분명한 고전적 소나타 형식에서 사용되는 장엄하고 화려한 결말인데, 구조가 불분명한 현대 음악은 시작이라는 단서도 딱히 없이 시작되고 코다와 같은 암시 없이 갑자기 끝나버리는 난해한 구조가 많다.

 마치 어린 아이들에겐 희노애락, 권선징악, 시공간의 구조,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들에서 질서를 배워야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배워진 질서가 무너지는 속에서도, 더 이상 바깥에서 찾을 수 없는 질서를 안에서 끌어내어 견뎌야하는 담대하고 강인함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마지막 코다에 대한 로망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로망이 있었다.

지금은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못하지만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면 꼭 하겠다는 식의 로망, 지금 춤추지 않으면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식의 로망이었다. 전나무 이야기와 함께 그 로망은 희미해져갔다. '인생은 그런 거지요..' 를 통해 그런 식의 로망이 환상임을, 환상이 많으면 괴롭다는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현실을 넘어서는 미래는 없으며 현실보다 앞서는 글도 없다. 아드레날린의 분출에 의한 들뜸의 행위가 아닌 철저한 자기반성과 사유로 인한 균형감 있는 표현일 때 책임 있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가 ‘이사크 디네센’ 이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 라고 한 말처럼 무심한듯한 철저함으로 부터, 김훈 작가가 『연필로 쓰기』에서 ‘나는 사람들이 ‘영감’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내가 겨우 쓰는 글은 오직 굼벵이 같은 노동의 소산이다.‘ 라고 한 말처럼 정직한 성장을 향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버닝》의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문예창작과를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사람들이 직업을 물으면 글을 쓴다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와, 대단하네. 작가님이시네.” 

 관심을 보이면서 

 “무슨 글을써요? 소설?”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네… 뭐… 아직… 쓰고 있는 중이라서요.” 

 하면서 얼버무린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종수가 글을 쓰는 것은 아버지의 탄원서를 쓰는 장면 하나다 다다. 종수는 고된 아르바이트와 현실의 무력감과 분노에 지쳐서 꿈을 꾸기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 지망생‘ 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볼 당시 나는 종수의 큰 이모뻘 되는 나이로 어쩌면 종수보다 더 갈급한 상태에서 인생2막을 준비하며 다양한 아르바이트의 세계를 전전하고 있었고, 그런 나의 눈에 들어온 종수라는 캐릭터는 단지 영화 속의 주인공, 사회 현상이 아닌 나를 포함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웃이라는 사실, 나의 일부라는 것을 체감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심각했고 아팠다. 

 당시에 고깃집 알바를 하면서 만났던 종수 뻘 되는 젊은이가 있었다. 제주도에서 와서 제주소년이라고 불렸던 그 청년은 음대를 나왔고 돈을 모아서 밴드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야심만만한 이 젊은이는 사장의 영업 확장에 부장으로 승진되면서 밤낮없이 일하느라 지친 몸으로 연습을 할 수 없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의 음악은 돼지고기 해체 작업을 하면서 트는 신나는 힙합과 영업을 마치면서 듣는 클럽음악이 전부였다. ‘음악을 하지 않는 밴드지망생‘ 인 그는 또 다른 종수였고, 알바를 전전하면서 조각 글을 쓰면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 현실에 발을 딛고 있고 가슴은 꿈을 향하지만 아직 원하는 문을 열어젖히지 못한 우리를 응원했다.

 소설가를 지망한다면, 음악가를 지망한다면 힘든 현실 속에서도 글을 써야하고, 연습을 해야만 한다. 나의 사정이 어떻든 얼마나 힘들든 그것이 엄정한 현실이다.

 안톤 체홉의 소설 『갈매기』에서의 한 대목이다. 


원하기만 했던 남자

수년 전 청년 시절

나는 작가가 되기를 원했다

되진 못했지만…

또 원한 게…

말을 잘하길 원했는데

형편없었지

결혼도 하길 원했지만

하지 못했고

또… 시내에 살길 원했지만

지금 시골에서 죽어간다.


 춤을 추지 않으면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꿈꾸기보다 지금 당장 춤을 출지어다.

언젠가 만들어질 구조가 멋진 코다가 아닌, 예고 없이 갑자기 끝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즉흥적인 춤을, 일상적, 항상적으로. 가능하다면 빗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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