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에게 사랑을 느낀 한 천사가 천사로서 죽고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다. 정신적인 존재인 천사는 물질 몸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다가 인간이 되고나서 빨강, 노랑, 파랑, 초록, 오렌지, 황토색……. 색깔을 배우면서 기뻐한다.
천사였다가 먼저 인간이 된 동료가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천사를 알아보고 말한다.
“여기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말해주고 싶네.
시원한 걸 만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담배와 커피 이걸 함께 하면 환상적이야.
그림도 그래. 연필로 굵은 선을 긋고 가는 선도 긋고, 그럼 멋진 선이 되지.
손이 시려오면 이렇게 비벼보게. 이것 또한 기분 좋지. 좋은 일은 아주 많아.
하지만 자네는 여기 없고 난 이곳에 있어. 이곳으로 와서 내게 말을 해봐.
난 친구니까. 동료라고.”
인간이 된 후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인간의 육체성을 느끼게 해주는 기념비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커피가 든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모습, 컵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커피 향을 맡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기쁜 미소를 짓는다. 다시 향을 맡고 다시 행복한 얼굴로 커피를 마신다. 그토록 원하던 감각을 처음으로 느끼는 천사였던 사람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소박하지만, 육체의 무기력을 느낄 때 보게 되면 커피 한 잔으로도 금방 행복해지는 장면이다.
색을 볼 수 있는 눈, 시원한 걸 만지는 좋은 기분, 연필로 선을 긋는 기쁨, 시린 손을 비빌 때 느끼는 온기….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또한 그렇기에 잘 느낄 수 없는 온기와 향과 맛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값진 자료다.
빔 벤더스 영화에서 천사의 커피가 있다면 내 인생 한 모퉁이에서 천사가 준 잊을 수 없는 커피가 있다. 분식집 마감청소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의 여명 속을 달리던 시절이었다. 추운 겨울이 유난히 더 춥던 새벽,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문을 두드리던 천사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옆집 맥도날드 라이더였다.
한 마디 말을 한 적도 없었는데 새벽 시간대에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청소를 하러 오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창문을 열려고 하자 쑥쓰러운 듯이 웃으며 커피만 두고 갔다. 그 이후로 한 동안 내가 청소를 시작할 때 즈음되면 창문 앞에 맥도날드 커피가 한 잔 배달되었다. 그 청년에 비하면 이모 정도인 연배의 나를 이성적인 호감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고, 알지도 못하는 옆 가게 청소 직원에게 베푼 그 따뜻한 호의는 무엇이었을까?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는 자신의 일상을 내 모습에 투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자신 처지와 닮은 나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위로와 격려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말 한마디 섞지 않은 맥도날드 라이더 천사에게 뜨거운 동료애를 느끼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가 전해준 한 잔의 온기를 마음으로나마 동 시간대 새벽을 여는 많은 생계형 알바들에게 전했다.
‘힘냅시다. 여러분, 세상은 상상할 수 있는 만큼 실재하고, 상상하는 만큼 아름답습니다.’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 되겠지만, 그 이후로 나에게는 맥도날드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가 되었다.
매일 아침, 몸을 입고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던 베를린 천사처럼, 새벽의 여명 속을 달리던 때에 맥도날드 천사가 전해준 커피를 마실 때처럼, 한 잔의 커피를 얼마나 완벽하게 기쁨으로 즐기느냐에서 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그윽한 커피 향, 토독토독 빗소리, 뻐근한 등 근육, 신비스럽게 피어올라가는 연기, 떨어지는 낙엽…….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온 몸의 감각을 열어놓고 집중하려고 한다. 기회의 육체, 육체의 기회를 소중하게 누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