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에 같이 나가는 양파를 써는 일을 일주일에 두세 번하고 있는데, 어제 양파를 썰면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모든 양파가 여덟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처음에 무심코 헤아려봤다가 두 번째 양파, 세 번째 양파도 모두 8개의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이번에도 여덟이야!"
"하나 더 해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이번에도 여덟이야!!"
나는 대단한 발견을 한 듯 상기되기 시작했다.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 스무 개의 양파를 썰면서 큰 양파든 작은 양파든 모두 같이 여덟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전율을 느꼈다. 발견의 기쁨이었다.
가장 중심에 있는 작은 원까지 포함하면 모두 아홉 개의 층이다.
곧바로 칼융이 '자기(self)'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했던 '9정(아홉 개의 원)'과 연결이 되었다. 지금껏 분식집에서 일해 온 5개월간 이 작업을 반복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느낌을 가졌느냐를 돌이켜 보면, 손님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불안 때문에 서둘러 마칠 생각을 하거나 선반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되는 작업대의 동선 때문에 맞은편에 있는 찬모 이모의 시선을 불편해하면서 서둘러 끝내려고 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또는 양파의 매운 냄새 때문에 곤혹스러워하기도 했다. 별 기대할 것이라고는 없는 반복적인 노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별 다를 것 없었던 양파의 9정을 확인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이 기뻤다.
사람들은 양파의 껍질에 대해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수많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등의 표현을 곧잘 하는데 그 표현이 얼마나 틀린 것인지 웃음이 났다.
'까도 까도라니. 겨우 여덟 개 밖에 안 된다고!'
발견한 자의 당당함으로 그런 모호한 표현을 찾아냈다.
'내가 했어. 내가 해봤지. 스무 개의 양파를 썰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헤아렸지. 내가. 직접. 내가 직접 했지. 매운 양파 냄새를 맡아가며 나무 도마에 번쩍이는 큰 식칼로 싹둑싹둑 썰어가면서 내가 다 확인했다고. 점점 더 반짝반짝해지는 두 눈으로 분명히 봤다고!'
괴테가 자신의 연구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 언급했던 기본적인 태도는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이었다. 그의 색채론은 수없는 실험과 자연 관찰, 수집과 정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전에 있어왔던 선험적인 체계화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 호기심이 살아날 때, 시간과 공간이 마법처럼 변하고 그 시. 공간에서 나는 주인공이 된다. 김밥과 순대를 팔면서도 예술가도 과학자도 될 수 있다.
순대의 양파를 따라 재미있고 교훈적인 양파 이야기가 딸려 나온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천국과 지옥,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양파 한 뿌리'라는 메타포를 사용해서 보여준다.
세상을 살면서 한 가지의 선행도 하지 않았기에 지옥에 떨어진 노파가 있었다. 그 노파의 담당 천사는 그녀가 한 가지라도 선행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바로 거지에게 양파 한 뿌리를 준 것이다. 천사는 이 선행을 기억해서 하느님께 그녀를 천당으로 올려달라 부탁했고, 하느님은 말씀하시길 그렇다면 그 양파 한 뿌리를 잡고 끊어지지 않는 채로 올라오면 그리 해주겠다고 하셨다. 그 말대로 천사는 노파에게 양파 한 뿌리를 건네어서 그녀를 지옥에서 올라오게 해 주었다. 하지만 같이 지옥에 있던 죄인들이 그런 노파를 보고 같이 따라서 올라가려 하자 노파가 외쳤다.
'이 양파는 내 거야! 날 구원하려는 것이지, 너희들을 구원하려는 게 아니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태 버티던 양파뿌리는 끊어졌고, 노파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졌다.
양파를 썰면서 발견한 기쁨이 오래전, 색채론 논문을 쓸 때 영감을 받았던 괴테와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조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