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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16. 2019

나는 김밥이 아니다

 

 하루 종일 한 자리에 서서 김밥을 말던 때가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몸이 부딪힐 만큼 좁은 공간에서 찬모 이모, 튀김 언니, 김밥 이모였던 나, 만두를 빚었던 만두 사장 이렇게 네 명이 보통 같이 일했고, 여기에 바쁜 시간대에 아르바이트생이 붙곤 했다. 한 명 한 명 독특한 캐릭터의 구성원들과 하루에 한 번은 꼭 뚜껑 열리게 만드는 이상하고 웃기는 손님들로 넘쳐났던 그곳. 


 연세가 60이셨던 찬모 이모는 나를 부를 때 특별한 호칭을 쓰지 않고 슬그머니 다가와서 용건만 말하든지, 딸 뻘 되는 나에게 '너'라고 지칭을 했다. 그런 곳에서는 의례히 나이 순으로 말을 놓거나 올리는 식이어서 그러려니 했다.

 어느 날, 멀찌감치 서있던 찬모 이모가 큰 소리로 "야, 김밥아!"라고 불렀는데, 순간 뱃속에 있던 큰 불덩이 같은 것이 가슴으로,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라오듯이 열불이 치솟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사실 단순히 "야, 김밥아!"라는 그 한 마디 만의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전에 그 사람에게 가지게 된 부정적인 인상과 감정이 밑바탕에 가득 깔려있었고, 거기에 불씨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 이모는 자기가 그 집에서 초기 멤버로서 고생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이 새로 들어오는 젊은 여자한테 친절하게 대해주고 자신은 당연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찬밥 취급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 이모의 이야기 구조에서 사장이 잘해주는 젊은 여자의 비어있던 등장인물의 자리에 내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니, 나 아닌 다른 젊은 여자였어도 싫기는 마찬가지였을 테고, 그 이모에겐 모든 젊은 여자가 다 미워 보였다. 


 이렇게 개성이 있는 한 사람을 일반화, 물체화시키는 것을 심리학적, 신학적 용어로 '시기'라고 한다. 나는 그 이모 인생 전반에 걸친 핵심 감정에 의해 어떤 노력을 해도 시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기 때문에 최대한 그 시기에 당하지 않도록 필요한 일만 하는 식으로 나름의 생존 방법을 선택했다.

 약 5초 정도 아주 강렬한 분노가 휩쓸고 지나간 후 목구멍에 차올랐던 불덩이를 언어화해서 입 밖으로 표현해 버릴까를 또 5초간 깊게 생각을 하다가 다시 그 불덩이를 집어삼키기 위한 주문을 외웠다.

 "나는 김밥이 아니다"

 "나는 김밥이 아니다"

 "나는 김밥이 아니다"

 속으로 세 번 외치고 나자 신기할 만큼 분노가 쑥 내려갔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적당히 응대하고 적당히 당해주자는 마음을 내어 오히려 커피를 한 잔 타줬더니 고맙다며 난리다. 


 그래, 내가 김밥이 아니면 그만이지, 또 김밥이면 어떤가?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 즉,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허상을 제대로 본 경험이었다.     

 ‘거짓교만과 거짓겸손은 쌍둥이다. 진정한 겸손은 실질적인 자기 평가와 자기 가치 부여에 근거한다. 거짓 겸손은 ‘독실한 채’하는 숨겨진 교만일 뿐이다.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강화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의 자율성은 이제 더 이상 도전 행위가 아니며, 자신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의 표현이다.‘ 

-리처드 로어, 『내 안의 접힌 날개』    


 언젠가, 왕년에 자신이 가장 잘 나갈 때나 존경받는 일을 할 때,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을 할 때의 모습에 대한 ‘상’을 가지는 것, 그 ‘상’에 대한 애착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니 ‘내가 있다’는 근원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내가 나서야 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나를 ‘무화(無化)’시키면서 겸손을 가장하는 것도 비열함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작아져야 할 때, ‘내가 누군지 알아? 왕년에…’ 하면서 흥분하는 마음도 옳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수용할 수 있을 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김밥이 되어 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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