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정옥 Feb 22. 2021

무지무지 잘드는 커다란 가위

-필리파 피어스 동화 필사

독서 후 느낌을 글로 정리하는 것도 좋지만 잔상을 시각적인 작업으로 남겨보는 것도 좋은 기억 방법이다. 눈 앞에 보이는 종이 조각들과 색연필,  가위, 풀로 독후감을 남겨보았다.


 이 이야기는 필리파 피어스(1920-)의 단편동화이다. 짧지만 막강한 상징이 응축되어 있어서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필리파 피어스는 어린시절의 공포와 고립, 강렬한 감정에 접근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중한 사람으로 문학성과 대중성을 갖춘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옛날에 팀이라는 남자아이가 살았는데, 걸핏하면 말썽을 피웠어요. 그럴 때면 엄마는 "팀!" 하고 나무라고, 아빠는 "팀!" 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죠. 하지만 할머니는 늘 "우리 팀이 얼마나 착한데!" 하고 감싸주셨답니다. 팀은 그런 할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죠. 그래서 할머니 댁에도 곧잘 놀러 갔는데, 갈 때마다 할머니는 멋진 선물을 주셨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연락이 왔지 뭐예요? 당장 병문안을 가야겠다고 하는 엄마에게 냉큼 

 "나도 갈래."

 하고 말했어요.

 하지만 엄마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안 돼. 할머니가 몹시 아프시단 말이야."

 팀은 얼굴을 찡그리며 발을 쾅 굴렀어요. 무지무지 화가 난 거예요.

 "얌전히 집이나 지키고 있어. 엄마 금방 올게."

 엄마가 말했지만, 팀은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오만상을 찌푸릴 뿐이었죠.

 "초인종 누른다고, 아무한테나 덜컥 문 열어 주지 말고. 알겠니?"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 버렸답니다.

 팀은 현관문을 닫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어요. 정말이지 이렇게 화가 난 건 난생처음이었어요. 타박타박 마당을 지나가는 발소리, 쿵 하고 대문이 닫히는 소리, 또각또각 걸어가는 소리. 엄마의 발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엄마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또 다른 발소리가 저벅저벅 다가왔어요. 발소리는 대문을 지나, 마당을 지나 현관문 앞에서 뚝 멈추었어요. 그러더니 급기야 '찌르릉!' 초인종이 울리지 않겠어요?

 팀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어요.

 찌르르릉! 초인종이 다시 울렸어요.

 하지만 팀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죠.

 그러자 우편함 뚜껑이 홱 젖혀지더니, 눈동자 두 개가 이쪽을 들여다보지 뭐예요! 뒤이어 우편함 너머에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덜컥 뛰어들었어요.

 "팀, 어서 문 열어라."

 어떡하지? 팀은 주춤주춤 문으로 다가가 사슬을 단단히 채우고는, 문을 빼꼼 열었어요. 문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만큼만 열렸죠. 그 틈으로 내다보니, 웬 아저씨가 큼직한 가방을 들고 현관 계단에 떡하니 서 있지 않겠어요?

 "자, 여기 네가 좋아할 만한 게 있다."

 낯선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현관 계단에다 가방을 척 내려놓더니 활짝 열어젖혔어요.

 그러자 가방 안에 붙어 있던 쪽지가 퍼뜩 팀의 눈에 띄었어요.



  "난 전투용 도끼가 좋아요."

 팀이 말하자 낯선 아저씨가 말했어요.

 "전투용 도끼는 떨어졌어."

 "그럼 칼은요?"

 "있지. 하지만 그보다 가위가 어떠냐?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가 있단 말씀이야."

 낯선 아저씨는 커다란 가방을 뒤지더니, 엄청나게 큰 가위를 꺼냈어요. 시퍼렇게 날이 선 가위는 무시무시하게 번뜩였어요.

 낯선 아저씨가 말했어요.

 "이 가위는 뭐든지 다 자를 수 있단다. 어떤 거나, 전부다."

 "그럼 그 가위로 할게요."

 팀은 냉큼 손을 내밀었어요.

 그러자 낯선 아저씨가 말했어요.

 "아, 공짜로는 안 되지. 이렇게 귀한 가위를 사는데, 당연히 돈을 내야지."

 "그럼, 잠깐만 기다리세요."

 팀은 이렇게 말하고 얼른 뛰어가서 저금통을 들고 왔어요. 저금통에 있던 돈을 몽땅 털어서 문틈으로 낯선 아저씨에게 건네주자 아저씨는 팀에게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를 건네주었죠. 그러고는 소름이 쫙 끼치게 씨익 웃더니 가 버렸답니다.

 팀은 현관문을 닫고 나서 가위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웠어요. 찰캉찰캉 가위질을 하다 보니, 아까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퍼뜩 떠올랐어요. 그래서 팀은 당장 가위를 시험해 보기로 했어요. 이 가위로는 뭐든지 자를 수 있다잖아요. 뭐든지!

 마침 현관에 걸려 있는 아빠의 외투가 눈에 띄었어요. 팀은 가위로 외투에 달린 단추를 모조리 떼어 냈어요. 싹둑! 싹둑! 싹둑! 싹둑! 투두둑! 단추들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정말이지 식은 죽 먹기였죠.

 하지만 보통 가위로도 단추 정도는 쉽게 뗄 수 있잖아요. 그래서 팀은 좀 더 어려운 것을 찾으러 거실로 갔어요. 제 아무리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라도 여간해선 자르기 힘들 만한 것을 찾았지요. 두툼한 양탄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팀은 양탄자를 반으로 잘랐어요. 맞아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하고요. 그러고 나서 반으로 자른 양탄자를 자르고, 자르고, 또 잘랐죠. 양탄자가 산산조각 날 때까지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로 싹둑싹둑, 싹둑싹둑!

 이번에는 나무 의자 다리를 잘라 보았어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는 의자 다리도 척척 잘랐답니다. 그러자 팀은 다른 의자랑 탁자 다리까지 싹둑싹둑 잘랐어요. 소파도 달랑 두 동강을 냈고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팀은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로 벽난로 위의 탁상 시계도 잘라 보았어요. 가위는 쇠붙이와 유리도 척척 잘랐어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가위질을 하니 시계도 금방 두 동강이 나 버렸지요.

 팀은 얼핏 어항에 든 금붕어도 잘라 볼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금붕어가 너무 가여웠어요. 그래서 금붕어는 어항에서 꺼내 물이 든 세숫대야에 넣어 두었답니다. 그러고는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로 어항을 싹둑 잘랐어요. 어항 유리가 깨지지도 않고 마치 종이처럼 잘라졌어요. 그래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하고 말이에요. 어항의 물이 마룻바닥에 쏴아아 쏟아졌어요. 

 이제 팀은 똑똑히 알 수 있었어요.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는 이 세상에 못 자르는 게 없어요. 가위는 마룻바닥과과 문도 싹둑싹둑 잘라 버릴 거예요. 벽돌로 된 벽도 싹둑싹둑 잘라 버리고, 슬레이트 지붕까지 싹둑싹둑 잘라 버리겠죠. 그러니까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는 온 집안을 싹둑싹둑 잘라서 쑥밭으로 만들고도 남을 거예요. 사실 가위는 벌써 그렇게 하기 시작했는걸요.

 팀은 맨 아래 계단에 털버덕 주저앉아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죠.

 그런데 잠시 후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발소리는 길을 따라오더니 팀네 대문으로 들어와서는, 마당을 지나 현관문 앞에서 딱 멈추었답니다. 그러고는 '찌르릉!' 초인종이 울렸죠.

 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요.

 아까 그 아저씨면 어쩌지?

 팀은 숨을 죽인 채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었어요.

 찌르르릉! 다시 초인종이 울렸어요.

 팀은 그래도 죽은 듯이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러자 우편함 뚜껑이 왈칵 열리더니, 눈동자 두 개가 이쪽을 빤히 들여다보지 뭐예요! 뒤이어 낯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팀, 문 좀 열어 주지 않으련?"

 그래서 팀은 다시 사슬을 단단히 채우고는, 문을 빼꼼 열고 밖을 내다보았어요. 현관 계단에는 처음 보는 할머니가 뚜껑이 달린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어요. 할머니는 팀을 보고 상냥하게 웃으며 바구니의 뚜껑을 열었어요. 

 그러자 바구니 안에 붙어 있던 쪽지가 팀의 눈에 확 들어왔어요.



 팀은 울먹이며 말했어요.

 "제가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로 물건들을 마구 잘랐어요. 그래서 온 집 안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고는 다시 으앙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어요.

 "그럼, 이 접착제가 필요하겠구나."

 "네, 정말로요."

 팀은 얼른 손을 내밀었어요.

 "아, 하지만 공짜로 줄 순 없어. 안 그러냐?"

 할머니가 말하자 팀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저는 돈이 하나도 없어요. 아까 가위 살 때 몽땅 줘 버렸어요."

 "그럼 그 비싼 가위와, 제일 잘 붙는 접착제를 바꾸자꾸나. 이 접착제를 뿌리기만 하면, 잘린 물건들이 감쪽같이 붙는단다."

 그래서 팀은 낯선 할머니에게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를 주고 접착제를 받았어요. 할머니가 떠나자 현관문을 닫고 사슬을 풀었어요.

 팀은 맨 먼저 아빠의 외투에 단추부터 달기로 했어요. 과연 할머니의 말대로였어요. 접착제를 칙칙 뿌리자 단추들이 언제 떨어졌느냐는 듯 멀쩡하게 외투에 도로 달라붙는게 아니겠어요?

 팀은 거실로 가서 산산조각 난 양탄자 쪼가리에 접착제를 칙칙 뿌려 보았어요. 그러자 양탄자가 다시 멀쩡해졌답니다. 의자들과 탁자도 접착제를 뿌리자 말끔히 붙었고요. 소파도 원래대로 하나가 되었답니다. 동강 났던 시계도 접착제를 뿌리자마자 다시 째깍거리기 시작했고요. 

 물론 어항도 다시 붙였어요. 바닥에 물이 흥건하긴 했지만요. 팀은 어항에 물을 채우고 금붕어를 도로 넣어 주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원래대로 붙여 놓자마자 현관문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요, 엄마가 돌아오신 거예요.

 엄마는 환히 웃으면서 들어왔어요.

 "할머니는 한결 나아지셨단다. 너한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시더구나."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얌전히 있었네. 조금도 어지르지 않았는걸."

 팀이 말했어요.

 "하지만 어항의 물을 쏟았어요."

 "그럴 수도 있지."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어요. 

 "엄마가 걸레로 닦을게."

 그러고는 걸레질을 하면서 얘기해 주었죠. 할머니께서 팀에게 특별 선물을 보내셨다고 말이에요.

 "너 주려고 예전에 만들어 놓으신 거래. 찬장에서 꺼내 가라고 하시더라."

 그러고는 가방에서 할머니가 직접 만든 나무딸기 잼 단지를 꺼냈어요. 나무딸기 잼은 팀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잼이에요.

 팀은 엄마와 함께 물을 보글보글 끓여서, 갓 구운 빵에다 버터와 나무딸기 잼을 발라 먹으며 호로록호로록 차를 마셨어요. 그러는 동안 아빠도 집에 돌아와, 맛있는 나무딸기 잼을 먹었답니다.


작가의 이전글 빨간 노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