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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May 14. 2021

세 개의 악몽

 보르헤스는 되풀이하여 꾸는 꿈으로 미로, 글, 거울이라는 세 개의 악몽을 말했다.

길을 찾을 수 없는 반복되는 미로와 자신이 시력을 잃고 나서 글자들이 살아움직여서 글을 읽을 수 없는 꿈을 꾸는데, 글자들이 사라져버려 글자없는 책이 되고, 친구들의 얼굴이 없어지고, 아무 것도 없는 거울이 되는 반복이 보르헤스의 악몽이라고 한다. 악몽의 느낌이 이미지로 제공되는 데에는 그 사람의 가장 내밀한 두려움과 공포의 경험이 있을 것이고 보르헤스에게 그것은 시력을 잃는 일에 닿아있다.

 문학의 거장 보르헤스는 이내 모든 불행은 작가에게 주어진 도구이며, 우리의 과제는 모든 추억과 정서와 심지어 슬픈 기억 까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르헤스의 악몽을 생각하다가 나에게 반복되는 세 개의 악몽을 기억해냈다.

 들러붙는 것, 구멍 뚫린 것, 뒤죽박죽 섞이는 것...


 들러붙는 것은 집착의 이미지다. 이에 들러붙는 엿과 같은, 같이 원하는 순간에는 좋지만 계속 붙잡고 있으면 싫어지는 접촉, 신발 밑창에 들러붙는 아스팔트의 덜마른 콜타르, 적절한 순간에 깨끗하게 떨어져 나가야 할 물질이 끈적하게 들러붙는 이미지의 불쾌함은 떼어내고 싶고, 멀리하고 싶어진다. 집착의 감정은 과도하게 원하는 바에 들러붙음으로써 원하는 바로 부터 떨쳐내어지고, 버림받고, 밀려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구멍뚫린 것. 힘들여 풍선을 불어서 만족스러운 크기가 되어 끝을 묶으려고 하는데 구멍이 있음을 발견했다.

 풍선은 내가 원하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이내 공기가 빠져나가고 풍선으로서의 존재감을 잃게 된다.

 기능도, 디자인도 좋은 마음에 드는 치약이 있다. 치약이 빠져나오는 입구 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면 눕혀놓거나 어떻게 두어도 상관없지만 용기에 구멍이 뚫린 치약은 수직으로 똑바로 들고다니거나 세워놓아야만 하는 불편함을 초래하는 장애가 생긴 것이고, 치약이 새지않도록 신경을 써야하니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뒤죽박죽 섞인 것, 밀린 빨래를 해서 모처럼 햇볕에 바삭하게 말린 기분좋은 빨래를 공들여 개어놓았다.

 높이 쌓아올린 옷들을 제때에 옷장에 넣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반듯하게 완결된 옷들의 공든 탑이 무너진다. 옆에 있던 빨랫감들과 섞여 버린다. 뭐가 빨랫감인지 새옷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된다. 모든 옷을 다시 빨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발생한다.

들러붙고, 구멍뚫리고, 뒤죽박죽 섞여버리는 혼돈의 상황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장애가 되고, 그것이 무한반복되면 절망적이어 진다. 

 

 악몽은 각자의 핵심 경험과 감정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지만 공통적인 속성은 무한반복이라는 점이다. 한 두번 꾸고 말면 그런 일도 있구나. 하고 털어내기 쉽지만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은 희망을 잃게하고 나아감을 회의적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 앞에서 무한반복해서 되새겨야 할 것은 꿈은 창조라는 사실이다.

마음 속 깊은 곳의 두려움이 끝없이 만들어내는 고착된 감정의 이미지라는 것.


 보르헤스의 악몽이 시력을 잃은 박탈의 경험에 닿아있는 것과 같이 나의 악몽 또한 박탈과 결핍의 경험에 닿아있으며 언제든 누구에게든 이 박탈과 결핍을 이해받고자 애써왔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의 박탈과 결핍과 악몽을 누군가에 말하고 이해받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모든 인간은 탄생 자체가 박탈의 경험이고, 인간은 누구나 고통체를 가지고 있으며, 고통을 싫어한다. 유독 나의 고통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따로 없고, 좋은 사람이라고 의지하고 고통을 이해받으려고 할 때, 좋아하는 사람을 멀어지게 한다는 모순 같은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보르헤스가 거장인 것은 시력을 잃어서도 악몽을 꾸어서도 아니고, 그 어마어마한 박탈과 결핍과 악몽의 무한반복 속에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악몽은 의식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깊은 내면의 두려움에 의해 끝없이 생겨나고 전개되는 뿌리깊은 감정임을 의식하는 것이다. 악몽이 창조라면 선몽도 창조할 수 있다.

 영원히 반복되는 악몽 보다 더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희망을 끝없이 꾸어야 한다.

 깨끗하고 반짝반짝하고 구멍 없이 매끈한 완전무결함, 완벽한 끝은 항상 아름다움을 움켜쥐기 직전에 깨고 마는 아쉬움을 동반한다. 그래서 그 역시 끝없는 희망을 갖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회의를 갖게한다.


 꿈이란, 삶이란, 사랑이란 항상 나의 일부라는 것, 과정이라는 것, 원래 그런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무한반복되는 악몽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무한반복의 미로 속을 꿋꿋이 헤매다니기를 선택할 수 있다.

 일부가 전체고, 과정이 결과고, 실망할 것도 실패랄 것도 없다는 것, 악몽을 꿨든 선몽을 꿨든 펼쳐진 삶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작가는 불행을 도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보르헤스 신의 말씀으로 작가됨의 험난함과 자부심을 떠올린다. 유명한 작가임에도 자신의 운명을 잘 모르는 자가 있고, 그저그런 작가임에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악몽과 불행과 글쓰기를 생각한다. 나의 운명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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