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정옥 Jun 27. 2022

내 안의 빛

 

 어제 오후와 저녁 사이의 2시간을 메울 요량으로 보았던 영화 <기도하는 남자>와 오늘 아침에 읽은 단편 <히치하이킹 도중의 사고>가 오버랩되면서 인간에 대한 역겨움과 연민이 스멀거린다.

<기도하는 남자>는 기도만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괴로운 개척 교회의 목사로 마음은 높으신 곳의 주님을 향하지만 무거운 현실은 끝이없는 나락으로 추락해가고, 밝음만이 아닌 어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구토하는 엔딩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히치하이킹 도중의 사고>는 제목 그대로 우연히 탄 차에서 사고를 당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진 짧은 글이다. 주인공 남자는 

'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감지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제 뭐든지 부정할 준비가 되었다.',

 '나도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와 같은 독백들로 예민하지만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들리는"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었다.

'그리고 당신, 어이없는 당신들, 당신은 내가 도와주길 바라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판단하고 예민하게 느끼면서 정작 행동하지 못하는 무력함의 끝에서 이를 바라보는 자신 안의 높은 이가 하는 말로 느껴졌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것을 결정하는 심판관, 즉 하느님은 우리의 선함이나 죄를 보시고 어딘가로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 죽었을 때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을 보게되며, 하느님 또한 이를 보고있는 우리를 바라볼 뿐이라는 것이다. 천국은 또 지옥은 살아온 모든 순간을 본 자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신의 눈을 보고 스스로 걸어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눈만 뜨면 마음에 들지않는 역겨운 세상과 이웃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성의 눈, 마음의 눈이 아닌 감각적인 육체의 눈으로만 보면 혐오스러움만 일어나는 면면들이다. 

더 깊고 맑은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잘 보고, 잘 느끼기.

객체인 타자가 나의 일부임을 알아차리는 것, 

달라이라마께서 설법 시작하실 때 늘 하시는 말씀처럼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고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 

역겨운 이웃도 나 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혐오를 거두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차게 비가 내린다. 환경이 힘들어지면 감정들도 거칠어지고 외부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럴수록 내 안의 빛을 더 환하게 밝혀 마음을 단속하고 속도를 유지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새아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