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를 읽고
프루스트라는 미로를 잘 통과하기 위해 <프루스트의 독서>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마음산책에서 나온 136페이지 짜리 작은 초록책은,
1.독서에 관하여
2. 침울한 주거지에 행복을
3. 달콤한 비축품
이렇게 3개의 짧은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어제 저녁에 읽고 오늘 아침에 쓸 내용은 첫번째, <독서에 관하여>이다.
이 글은 프루스트가 유일하게 번역한 작가, 러스킨의 <참깨와 백합>서문이라고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예고하듯이 어린 시절 독서 기억을 펼쳐낸다.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린 시절의 날들 가운데 아마 우리가 좋아하는 책과 더불어 보낸 날들, 살지 않고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그런 날만큼 충만하게 산 날들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 프루스트가 얼마나 독서를 좋아했는지 특유의 섬세한 관찰과 묘사로 그림을 그려낸다.
자신의 독서 경험을 서술한 뒤, 이어 뒤쪽으로 갈수록 독서란 무엇인가, 독서를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등의 핵심적인 문장이 힘찬 아름다움으로 펼쳐진다. 프루스트가 말하는 독서에서 인상깊었던 대목들을 요약, 인용한다.
'독서는 고독 속에서 지적 역량을 즐기는 것이며 사유의 중심까지 가려고 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에 있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안내할 수는 있지만 그 삶을 이루지는 않는다.'
'우울증 같은 몇몇 병적인 경우에는 독서가 일종의 치료법이 될 수 있고, 거듭되는 독려를 통해 게으른 정신을 정신의 삶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임무를 질 수 있다.'
'그들의 경우 일종의 게으름 또는 변덕이 그들 자신의 깊은 내면에, 정신의 진짜 삶이 시작되는 깊은 곳에 자발적으로 내려가는 걸 가로막는다. 그들을 그곳으로 한번 인도한다고 해서 그들이 거기서 진정한 풍요로움을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이런 외부의 개입이 없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영원히 망각하고 표면에만 머물며 수동 상태에 빠져 살아서 온갖 쾌락의 노리개가 되고, 주변을 둘러싸고 흔들어대는 사람들의 크기로 축소되고 만다. 어린 시절부터 노상강도들과 함께 살며 너무 오랫동안 이름을 쓰지 않아서 더 이상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외적인 충동이 그들을 강제로 정신의 삶 속으로 다시 이끌어 그들 스스로 생각하고 창조할 힘을 동연 되찾게 해주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내면에서 그들 정신의 고결함에 대한 모든 기억과 모든 감정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게으른 정신이 자기 내면에서 찾지 못하기에 타인에게서 올 수밖에 없는 그 충동을 정신이 고독 속에서 맞이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 정신 안에서 되살려야 할 그런 창조적인 활동은 고독 밖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게으른 정신은 순수한 고독에서 아무 것도 끌어내지 못한다. 창조적 활동을 스스로 시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개입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와 우리 내면 깊숙이 작용하는 개입, 다른 정신으로부터 오지만 고독 속에서 맞이하는 충동 말이다. ... 이것이 독서의 정의이고, 오직 독서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그런 정신에 이로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행이 독서다.'
그리고 독서에 대한 정의를 쏟아내고 난 뒤, '진리'를 말한다.
'진리는 오직 생각의 내밀한 발전과 마음의 노력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이상이며, 진리를 소유하게 될지 여부는 선한 의지에 달렸다.'고.
이 글을 읽고 가장 강력하게 남았던 단어는 '게으른 정신'이었다.
나의 화두인 '인생을 불행으로 이끄는 정신적인 문제'의 적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게으른 정신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 단어는 '성실한 정신'이라든가 '부지런한 정신', '열심한 정신'이 아니라 '독창적인 정신'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열심한 정신도 좋지만 독창적인 정신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창적인 정신은 보다 더 깊고 내밀한 다른 차원의 정신, 프루스트가 여러번 강조해서 말한 '고독'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정신, 궁극으로 도달해야 할 자족과 평화의 상태라고 말이다.
오늘 부로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을 자랑스러워 하지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