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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r 10. 2023

나태, 게으른 정신의 이름

-조르조 아감벤, <정오의 악령>


 어제, '게으른 정신'에 대한 글을 쓰다가 예전에 읽었던 비슷한 내용이 생각났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저서 <행간>에 수록된 <정오의 악령>으로 너무나 인상깊었기에 공부모임에서 나눔도 했었던 글이다. 수 년에 걸쳐 가끔 정신이 산만해질 때 찾아읽어보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산만한 정신을 잘 묘사했나 감탄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우울해지기도 하고, 전투력이 타오르기도 했던 페이지들은 형광펜과 볼펜으로 두겹, 세겹 그어논 화려한 밑줄의 흔적과 감정의 손때가 묻어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디지털 텍스트로 만들어두고 더 자주 들여다보면서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목적으로 전체 내용을 필사해보았다. 나른한 봄기운과 함께 느슨해진 정신의 틈으로 찾아오는 게으름의 이름, 정오의 악령, 나태를 기억하고자.


 '중세가 흘러가는 동안 줄곧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성과 빌라와 도시의 궁전에 들이닥치면서 고행자들의 사막과 수도원의 회랑과 독방, 은둔자들의 기도실에까지 스며들며 이들의 영적 삶을 침범했다. 이 재앙이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다양한 방식에 교부들이 붙인 이름들이 있다. 바로 나태, 슬픔, 의욕상실, 게으름과 같은 이름들이다. 비록 이 재앙의 이미지가 중세의 <미덕과 악덕 전집>에서, 필사본의 세밀화 속에서, 칠죄종을 다루는 대중적인 작품들 속에서도 다섯 번째 자리밖에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고전 해석학은 이것을 악덕 중의 악덕, 어떤 식으로든 용서가 되지 않는 유일한 악덕으로 분류하고 있다.


 교부들이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맞서 싸웠던 것이 바로 이 정오의 악령, 종교인들 가운데 희생자를 골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공격해오던 악령이 불러일으키는 위험이었다. 영혼을 위협하는 또 다른 종류의 유혹이 문제였다면, 아마도 교부들의 글이 그렇게까지 심리적으로 잔인하게 파고들거나 집요하고 차가운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태한 인간의 시선이 집요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창가에 머문다. 그는 누가 찾아오는 장면을 떠올린다. 문이 조금만 삐걱거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또 무슨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본다. 하지만 길가로 나서는 대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원해의 자리로 무기력하게 돌아와 앉는다. 책을 읽다가도 불안한 마음에 독서를 중단하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진다. 손으로 얼굴을 비빈 뒤에 손가락을 펴고 눈을 들어 시선을 벽에 고정시킨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모든 말들의 마지막 음절을 더듬거리면서 몇 줄 정도 더 읽어 내려간다. 그러는 사이에 쓸모없는 계산으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책과 공책의 페이지 수를 세기 시작한다. 글자와 눈앞에 있는 멋진 세밀화들이 미워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덮어버린 책을 베개 삼아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느낌이, 배가 고파서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느낌이 그를 잠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정오의 악령은 한 불쌍한 수도사의 머리에 강박관념을 심고 동시에 그가 위치한 곳의 공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가 머무는 독방에 대한 불편함과 그와 함께 지내는 수도사들의 추잡함을 상기시킨다. 그의 형제들은 이제 그에게 게으르고 우스꽝스러운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악령은 독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에 앞서 그를 무기력한 인간으로, 마음을 편히 다스리지 못하도록, 독서에 전념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결국 수도원 생활에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이 불쌍한 수도사는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한숨을 쉬면서 그가 있는 곳에 머무르는 한, 자신의 영혼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다고 염려하기 시작한다. 투덜거리면서 자신은 영혼의 어떤 과제도 소화해낼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선포한다. 항상 똑같은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릿속이 텅 빈 채로 살아가는 상황을 그는 괴로워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인도해야 할 그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 만한 일도 하지 못했다. 그는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멀리 있는 수도원들을 떠벌리득이 칭찬하면서 그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 형제들 사이에서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결한 느낌의 수도원을 떠올린다. 반대로,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어렵고 귀찮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에게 형제들은 아무런 특성이 없는 인간으로 비친다. 게다가 음식을 구하는 것도 굉장한 노고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독방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절대로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오시 혹은 육시가 돌아오면 갑자기 몸이 피로해지면서 미칠 듯이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다. 마치 긴 여행을, 혹은 힘든 일을 마치고 지칠 대로 지쳐 돌아온 사람처럼, 혹은 이삼일 정도 굶은 사람처럼. 그래서 그는 독방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이리저리 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황혼을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태양을 노려본다. 결국, 그의 머리 위에는 대지를 휘감는 안개처럼 혼돈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혼돈을 그를 텅 비우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교부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우의적 경향의 사고방식이 나태의 환각적. 심리학적 성좌를 탁월한 방식으로 고착화할 수 있었던 것은 나태의 딸들이 열을 지어 지옥으로 향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태가 낳는 것은 무엇보다도 악, 선 자체에 대한 모호하고 멈출 수 없는 애증과 적개심, 선을 권고하는 사람들에 대한 악의적인 저항과 소심함, 영적 존재로서의 의무와 어려움 앞에서 두려워하며 꽁무니를 빼는 "왜소한 영혼"의 거리낌과 절망, 아무것도, 신의 자비조차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유죄판결을 앞당겨 받았다고 믿고 기꺼이 몰락의 길로 빠져드는 암담하고 오만한 확신과 둔감함, 치유를 가능케 하는 어떤 행동도 마비시켜버리는 둔하고 졸음 섞인 혼미 상태 그리고 정신의 산만함, 즉 자기로부터의 도주와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며 불안 가운데 게속되는 다변 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허황된 자기중심적 지론, 더불어 궁금증이 안고 있는 사라지지 않는 갈증, 보기 위해 보고 싶어 하고 항상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분해되는 갈증, 자신의 위치와 의도에 대한 불안, 부적절한 사고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내세우며 자신의 생각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상태 같은 것들이다.


 현대 심리학은 나태가 노동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적 윤리에 어긋난다고 보고 하나의 죄로 간주하면서 나태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전적으로 무시해왔다. 때문에 이제는 정오의 악령과 그의 딸들을 화려하게 의인화하는 중세사상 속에서 우리가 흔히 나태한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게으르다는 의미, 소극적이라는 의미 등을 무의식적으로 모두 한꺼번에 포함하는 표현들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종종 벌어지는 것처럼, 한 현상의 오해와 그것의 최소화는 그 현상이 우리와는 상관없고 이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그것이 우리와 너무 가까이, 제거하거나 위장을 해야 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는 나태의 딸들을 해석하면서 교부들이 사용했던 동일한 범주를 하이데거 역시 이용했음에도 그걸 알아차린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긍정'이 정통하지 못한 익명적 차원으로 추락하는 현상과 일상의 무의미함을 분석하면서 똑같은 카테고리들을 사용했고 그의 분석은 이른바 대중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경험하는 수많은 사회적 변화에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했다. 물론 항상 의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가는 말들은 거의 용어적인 차원에서 일치한다. 정신의 산만함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정통한 가능성으로부터의 도주와 유희가 되고 다변은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을 어디에서든 끊임없이 감추면서 존재함을 애매함 속에 가두어버리는 "수다"가 된다. 궁금증은 "새로운 것을 찾는, 그것을 원하는 유일한 이유가 다시 한 번 좀 더 새로운 것을 향해 도약하기 위해서일 뿐인 궁금증", 눈앞에 나타난 것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이 "멈출 수 없음"(교부들이 말하는 불안)을 통해 지속적인 산만함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궁금증이다.


 중세가 나태한 인간의 형상 속에서 구체화시켰던 심리학적 지식의 부활은 결과적으로 단순한 기능 교육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가능성이 있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정오의 유령이 쓰고 있는 가증스러운 가면은 상상했던 것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더 친숙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태의 본질에 대해 교부들이 관찰한 내용들을 <신학대전>속에 꼼꼼히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나태는 '일종의 슬픔', 좀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자산 앞에서의 슬픔, 즉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별한 영적 존엄성 앞에서의 슬픔이다. 나태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그러니까 악과 병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반대로, 가장 위대한 유산에 대한 생각이다. 나태는 정확히 말해 신 앞에 선 인간이 그에 대한 의무로부터 듀려움에 떨며 도망가는 현기증 나는 후퇴를 의미한다. 즉,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 없는 것 앞에서의 도주인 만큼, 나태는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을 뜻한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나태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혹독한 병이다. 이 병의 처참한 이미지를 키레르케고어는 나태의 가장 무서운 결과를 묘사하면서 또렷하게 그려내고 있다. "스스로가 절망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절망은 자아 속에 무언가 영원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지 않으려 하거나, 혹은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기를 갈망한다."


 이 신성한 선 앞에서의 후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영적 가능성 앞에서의 후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어쨌든 하나의 기본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중세 심리학이 이루어낸 가장 놀라운 성과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모순의 발견이다. 나태한 인간이 신의 섭리를 잊어버린다거나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그에게 부족한 것이 구원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면,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나태한 인간의 후퇴가 결국 드러내는 것은 욕망의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접근하기 점점 불가능해지는 욕망의 대상이다. 나태한 인간의 타락은 대상은 원하면서도 그것에 이르는 길은 원하지 않는 욕망의 타락이다. 그는 욕망하면서도 욕망의 성취를 위한 길을 가로막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절망과 욕망과의 알쏭달쏭한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갈망하지 않는 것은 희망의 대상도, 절망의 대상도 될 수 없다." 그의 <신학대전>에서 나태가 열심, 즉 기대나 관심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 즉 하느님 안에 거하는 영혼의 만족과 상반된 것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나태의 성좌가 모호하고 관능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야코포네 다 베네벤토의 나태함에 대한 순진하고도 대중적인 묘사가 지적하고자 했던 바는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한 대상 앞에서 끈질기게 울부짖는 욕망의 목소리다. "나태는 모든 것을 원하지만 고생은 원하지 않는다." 중세의 저자들이 그들의 과감한 사변적 직관력을 집중시켰던 환상적 어원론을 토대로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가 아래와 같은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던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이다. "절망을 절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을 걷기 위한 신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가서가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집요하게 쫓아가는 목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목표를 수치스럽게 응시하면서, 나태한 인간은 하나의 모순적인 상황, 카프카가 말했듯이 "목표 지점은 존재하지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달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부터 도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거머질 수 없는 욕망의 대상 사이에서 펼쳐지는 심연 속으로 끊임없이 침몰하는 모습이 바로 중세의 도상학이 '나태'라는 유형에 고정시킨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머리를 손바닥에 고이고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비탄에 빠진 여인의 모습으로, 혹은 낙담한 채 몸과 마음을 악마가 내미는 베개에 내맡기는 부르주아 내지는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중세의 기억술이 관찰자의 이해를 위해 제공하는 것은 게으른 사람의 "졸음이라는 죄악"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가 아니라 시선과 고개를 떨어뜨리는 행동, 즉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의 한 영혼의 절망적인 마비 상태를 상징하는 행동이다. 나태가 부정적인 극성을 한 가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나태 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 때문이다. 교부들은 영적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전복적인 변론 능력을 발휘해 죽음에 이르는 슬픔(혹은 악마적이거나 세상에 피로를 느낀 슬픔) 옆에 건강한 슬픔(혹은 유용하거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슬픔)을 대치시켰다. 후자는 "영혼을 위한 황금빛 자극"이며 구원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악습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덕목으로 여겨야 한다." 조반니 클리마코의 <천국의 계단>에서, 무아경에 빠진 영적 상승작용의 일곱 번째 단계는 "희열을 만들어내는 오열"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은 "무언가에 대한 타오르는 갈증을 느끼면서 항상 그것을 찾아다니는 영혼의 고통과 슬픔"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것은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안절부절못하고 아우성과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달아나는 욕망의 대상을 뒤쫓는다."


 바로 나태의 부정적 극성이 가지고 있는 모호함이 이런 방식으로 변증의 양분이 되어 빼앗김을 소유로 탈바꿈시키게 된다. 나태의 욕망은 근접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태는 대상으로부터의 도주일 뿐 아니라 대상을 향한 도주이기도 하다.
나태는 부정과 결핍의 언어로만 욕망의 대상과 소통한다. 이러한 추상적인 비유들이 때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석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나태는 멀어지는 대상의 꽉 찬 모습을 스스로의 음각 속에 그려낸다. 나태가 도주하는 동안 취하는 모든 행동은 대상과의 결속력이 오랫동안 지속되리라는 믿음의 행동이다.
나태의 음흉한 의도가 거머쥘 수 없는 것의 현현을 위해 공간을 마련하는 만큼 이제 나태한 인간은, 희망이 모든 희망을 버린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꿈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암울한 지혜의 증인이 된다. 이처럼 변증적인 것이 바로 "정오의 유령"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회복의 가능성을 '스스로' 가지고 있듯이 우리는 나태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가장 커다란 불행은 불행을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것이다." 


-<정오의 악령>:조르조 아감벤, <행간>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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