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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r 23. 2023

길을 잃고 헤매는 기술

-발터 벤야민에게서 배우는 길을 잃고 헤매는 기술


문방구


 아이였을 때, 길을 가다가 계획에 없던 길로 들어서기를 곧잘 했고, 그것은 하나의 여행이고, 모험이고, 탐험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연필, 공책, 책받침만 팔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에 대한 작은 책이나 바르면 손톱이 상하는 알 수 없는 성분의 매니큐어와 조악하게 반짝이는 플라스틱 액세서리들과 오색찬란하며 심하게 단 사탕들로 어린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그런 물건들에 마음을 뺏기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부 다 갖고 싶은 마음에 눈동자도 심하게 반짝였다. 한 개만 살 수밖에 없지만 다음에는 '저걸 꼭 사고 말겠다'는 희망에 찬 계획도 생기게 되는 마술가게였다.

 보통은 문방구를 나와서 길을 나설 때 목표했던 곳을 생각해 내서 길을 갔지만, 때때로 어디에 갈 참이었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했고, 기억이 났어도 철회하고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 나의 정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무시하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보다 일어난 일에 정신을 빼앗기는 식으로 분열되었고, 그런 분열적 자아는 학습으로도, 인생을 사는 전반으로도 확대되어 그럴듯한 하나의 세계관으로 응집시키지 못하여 뭔가를 이루거나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하는, 모종의 열패감을 주는 성향으로 느끼고 있는 터였다.

 그런 와중에도 또 다른 내적 자아는 알고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은밀한 즐거움과 자유의 상태를, 한 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앞만 보고 전진한 사람이 보지 못한 옆과 위, 사선 방향의 독특한 풍경의 아름다움을, 하지만 모종의 죄의식이 묻은 즐거움과 자유는 힘이 약했다.

이때, 또다시 길을 잃고 만난 벤야민은 길을 잃고 헤매는 성향 즉, 타고난 결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쓸모없는 것을 유용한 것으로 바꾸는 기술에 대해 말했고, 이 위대한 선포는 나의 분열적 자아에게 놀라운 면죄부로 작용해서 힘을 실어주고 있다.



프루스트의 미로


 프루스트는 듣던바 대로 미로다. 방대하고 섬세한 미로 속에서 금방 길을 잃고 말았다.

콩브레 마을의 모퉁이를 돌아 접어든 곳은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다. 그런 길이 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가던 길을 가야 할 것 같았지만 약간의 갈등 끝에 벤야민이 만들어 놓은 길로 들어섰고, 다시 돌아서 나가기에 한참이 걸릴 것 같다는 예감을 하고 있다. 계획이 틀어지고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를 무수히 뻗어있는 교차로, 재미있는 것들로 반짝이는 길 위에서 한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다음번엔 저걸 꼭 읽고 말겠다'는 야심에 찬 포부가 일어나는, 어린 날의 문방구 같은 거인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발터 벤야민.

다음은 발터 벤야민의 대표작 <일방통행로>에 실린 첫 번째 단편이다. 앞으로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의 단편들을 한편씩 필사하는 방식으로 브런치를 채워볼 요량이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 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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