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호의 숨겨진 우주

구체적인 호기심이 만들어내는 세계

by 오렌


메이드들은 장기 투숙객을 선호했다. 간단 정비로 조금은 수월한 시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나날이 지속되면서 어느덧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에게도 장기 투숙객이 생겼다. 비고란에 2020호 손님이 한 달간 머문다고 되어 있었다. 게다가 2020호는 VIP룸이었기 때문에 일반 객실에 비해 1.5로 지급되었다. 2020호 손님은 메이드들이 가장 선호하는 고객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스케줄에 따라 정비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고, 방도 무척 깨끗하게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매일 침대 한가운데 은행에서 갓 찍어낸 것 같은 만 원권 지폐가 팁으로 놓여있었다.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잠만 자는 듯이 흐트러짐 없는 방에 유일하게 다른 요소로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책이 두 권 놓여 있었다.


<COSMOS>
<Quantum Physics>


였다. 책 유튜브 채널에서 인생 최고의 책으로 자주 언급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구매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보게 되니 당장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퇴근길에 곧장 서점에 가서 사고 말았다. 2020호 고객에게 받은 팁을 모아서 사게 되니 꼭 그분께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펼칠 때마다 아름다운 별들이 쏟아지는 책을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우주를 갖게 된 것 같았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감동이 물결쳤다. 왜 사람들이 인생 최고의 책이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두껍고 비싼 우주 책을 읽고 나서 기대했던 과학적인 지식이 쌓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우주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 지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푸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끝없이 일어나는 잡다한 일상의 불만보다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보자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Quantum Physics>, 양자물리학이었다. 미시세계의 물리학, 전혀 모르지만 단어를 접할 때마다 알고 싶은 욕구를 가져왔던 분야였다. 2020호 고객이 가지고 있는 책은 코스모스와 양자물리학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은 정비하러 들어갔을 때 트렁크가 바닥에 열려있었다. 늘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정돈이 잘 되어 있는 객실이라 룸 가운데 커다란 트렁크가 열려있어서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트렁크 속에는 이중 나선의 DNA 모형이나 분자 모형, 인체 뼈 해부도, 뇌 사진 등의 표지로 장식된 두꺼운 과학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여행용 트렁크 속에 든 그 과학책들은 마치 보물 상자 속에 든 황금과 보석처럼 빛을 내뿜었다. 2020호 고객이 과학자인지 취미로 과학책을 읽는 분인지 과학책을 파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어떤 이유로 그 많은 과학책들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의 내 방 책장에 한 권 두 권 늘어난 과학책들이 그때 본 장면처럼 쌓이고 있다. ‘포기’의 다른 말은 ‘가능성’이다. ‘후회’의 다른 말은 ‘동경’이다. 수학과 과학을 후회 없이 했다면 이런 절실한 동경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바닷가 앞 호텔 헤르메스 2020호 트렁크 속 과학책은 내 안의 깊은 바닷속, 침몰한 해적선에 숨겨진 보물상자에서 발견한 황금과 보석이었다.




2020호를 드나들면서 과학책들을 읽을 무렵 잊히지 않는 꿈을 꾸었다. 꿈에 웅장한 중세의 도서관에 갔다. 둥근 돔 천장과 벽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프레스코, 모자이크 같은 교회 장식으로 되어 있었다. 높은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에 널찍한 원목 테이블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끝에 사람들이 앉아 있어서 다가갔다. 두 사람의 학자가 법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앉아서 개성이 강한 그들의 외형을 관찰했다. 내 오른쪽 옆자리의 흰 수염이 긴 학자는 옆면이 황금으로 된 커다란 책을 읽고 있었고, 내 왼쪽 옆자리의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사제 같은 분은 단단한 차돌처럼 생긴 검은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또 한 명의 학자는 이집트 벽화에서 본 것과 같이 몸은 사람이고, 머리가 새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초록빛이 나는 돌판에 뭔가를 새기고 있었다. 새 머리의 학자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문서라고 하면서 빛이 나는 초록빛 석판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식물과 동물, 보석과 인간이 정교한 그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새 머리의 학자는 마치 필라테스할 때 사용하는 폼롤러 같은 흰색의 길쭉한 원기둥을 나에게 주었다. 그 끝에는 여덟 개의 긴 끈이 달려있었는데 그 실을 땋으라고 했다. 선물을 받고 돌아 나오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거울에 비친 나는 그들처럼 학자 같은 검은 옷을 입고 브론즈색 긴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헤르미온느와 같았다. 우주를 개척하는 21세기에 사는 중년의 내가 어두운 중세의 도서관 속 똑 부러지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되어 있는 꿈은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갈 길이 멀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




2020호로 인한 뒤늦은 과학에의 호기심은 삶의 반경을 넓혀주었다. Quantum Physics를 검색하던 도중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를 만났다. 이화여자대학교 기초과학연구원 나노과학연구단에서 주최하는 <양자의 세계>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미술공모전이었다. 처음에는 나와는 거리가 먼 나라의 소식인 것 같아서 창을 닫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계속 생각이 났다. 다시 슬그머니 검색해 보았다. 공모전 안내 양식에 주제인 양자를 이해하고 아이디어를 내는데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었다.


#앤트맨과 와스프(영화) #슈뢰딩거 고양이 #양자역학 #양자나노과학연구단(뉴스)

제시된 키워드로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막연한 느낌들이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살아났다. 링크되어 있는 홍보영상을 보면서 점차 빠져들었고, 참여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 까지 도달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물리가 내가 제일 편안해하는 미술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참가 자격도 따로 없었고,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자료로 공부를 하고 자기만의 해석으로 창작한 결과물을 형식에 구애 없이 출품하면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석박사 통합 과정 김진경 님의 공모전에 대한 안내를 돕는 글을 통해 막연히 어려웠던 양자 세계가 친숙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정체성을 고민하며 삶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는 자연의 기본적인 속성으로, 세상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신개념을 제공했습니다. 양자의 결론에 의하면 세상은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률로, 추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의 인식을 벗어난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고 있죠. 예술과 과학은 인간과 자연을 탐구하고 표현합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이죠. ‘얽힘’ 상태의 예술과 과학, 그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이것은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써 의미가 있습니다.

이 공모전에서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양자물리학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조금 더 구체적인 형상으로 만들어 내 삶 속에 연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공모전을 통해 얻은 교훈은 삶의 구체성을 통함으로써만 나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막연한 관심사’에 머물러 있었던 양자역학이 ‘양자의 세계미술전’라는 구체적인 세상에 들어가 탐험함으로써 내 이야기가 있는 나의 세계가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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