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글감 노트의 이름을 짓다
강연 메시지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꿈과 기억을 싣고 항해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물을 주지 않아서 쉽게 시들어 버리는 내 단어들을 생각하게 했다.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물의 이미지를 넣어서 ‘세상의 지평을 열어갈 나만의 탐험선’인 글감 노트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조 구호가 떠 올랐다. 그때 책상 배치를 조별 모둠으로 해서 앉았고 각 조별 구호를 만들어서 조별 대항으로 발표나 경기를 하기 전에 구호를 외쳤던 기억이 났다.
"물 주자, 키우자, 피우자, 야!"
여덟 명의 열두 살 어린이들의 외침이 똘망똘망하게 귓가에 울렸다. 나만의 단어에 물을 주어서 꽃 피우는 이미지로 노트의 이름이 지었다.
‘너의 단어를 물로 가득 채워라’
씻고 흘러서 새롭게 하는 생명의 물을 영혼의 질료로 삼아 다시는 중단 없이 글쓰기를 이어나가겠다는 포부를 담아서.
새 글감 노트에 또박또박 정성껏 제목을 쓰자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이 생각났다. 오래전에 우연히 본 영화였고, 배와 단어를 소재로 풀어나갔다는 기억이 연결되어서 다시 찾아보았다.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원작으로 사전편집부에서 사전 만들기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사전의 이름을 ‘대도해’로 짓는데,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이므로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자는 의미다.
<행복한 사전>에서 숫기 없는 주인공 마지메가 사전편집부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일이긴 한데 어렵다는 말을 하자 하숙집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지메(우리말로 성실이라는 뜻이다.)는 좋겠어. 좋아하는 일을 찾았으니 이제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되니까."
평범하고 단순한 이 말이 크게, 깊이, 오래 남았다.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는 사람도 있고,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다. 빠르고 늦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하숙집 할머니 말씀대로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사전편집부에서 단어 하나의 뜻풀이를 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흥미진진하면서도 엄숙한 기분을 일으켰다. 연애 경험이 없는 마지메는 하숙집 할머니의 손녀 가구야를 사랑하게 되면서 연애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본다.
연애 :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고양된 기분으로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 하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길 바라면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거나 드물게는 이루어져서 환희에 이르는 상태에 있는 것
대도해에 실릴 '사랑'의 뜻풀이로 쓰인 것은 1번이 '더할 나위 없는 것으로서 대상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 2번 뜻풀이로 쓰여진 것은 '이성을 사모하는 마음. 성욕을 동반할 때도 있다. 연애'라고 되어 있었다. 마지메는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대도해에서 '사랑'의 뜻을 찾아보았을 때의 느낄 위화감이 걱정되었고, 사랑의 뜻풀이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의견을 전달하여 결국 '이성을 그리워하다'를 '타인을 그리워하다'로 고친다. 단어 하나를 찾아볼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는 마지메를 보면서 사전편집부 일에 익숙해져 있기에 잘하게 된 기시베의 성찰적인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대단한 고민도 콤플렉스도 없이 지금까지 멍하게 살아온 것은 내 쪽이 아닌가.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편한 쪽으로 흘러가도록 안일하게 살며 일을 해 왔을 뿐이니.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 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 세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기시베는 대도해 편찬을 통해 말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진실한 의미로 손에 넣으려 하고 있는 참이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단어들은 환경으로부터 수동적으로 흡수되어 내 것인 듯이 착각하게 된 타인의 생각인 것이 대부분이다. 온 힘을 다해 달려온 곳에서 어리둥절했던 어두운 숲 속의 실체는 결국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대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이루는 중요한 단어를 내 생각으로 내 말로 하나하나 정의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어둠을 밝혀나가는 한줄기 분명한 빛이 될 것이다. 그 빛으로서의 글감 노트를 생각한다. 일기나 편지, 메모나 다이어리의 형식으로 꾸준히 써온 글이라는 매체가 글감 노트라는 보다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한 편의 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30년도 더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열심히다. 나에게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줄거리를 찾는 일이다. 독특하고 좋은 줄거리를 얻기란 매우 어렵다. 언제 마음속에 멋진 발상이 떠오를지 결코 모르지만, 그런 발상이 떠오르면 양손으로 움켜쥐고 꽉 붙잡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즉각 메모를 해두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좋은 줄거리는 꿈과 같다. 꿈에서 깬 즉시 종이에 적어두지 않는다면 아마 잊어버리고 꿈은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별안간 찾아오면 서둘러 연필이나 크레용이나 립스틱이나 뭐든 간에 쓸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중에 그 아이디어를 다시 떠오르게 할 단어 몇 개를 끄적인다. 한 단어로 충분할 때도 많다.’
이 글은 동화 작가, 로알드 달의 자전적 단편 <행운-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중의 일부이다.
프루스트의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이 유년의 기억으로 데려가듯이 로알드 달의 빨간 공책은 오랫동안 롤러코스터 같이 굴곡진 인생길에서 ‘play’와 ‘pause’를 수없이 반복하며 ‘쓰이기’와 ‘중단하기’와 함께 ‘믿음과 의심’ 사이를 무수히도 반복해 오던 내면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진지하게 집중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로알드 달의 빨간 공책은 기억 속에 묻혀있던 내 인생의 노트들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작가, 화가, 작곡가, 과학자……, 창의적인 발상을 하는 수많은 직종의 사람들에게 메모나 스케치, 수첩이나 노트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한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노트 자체로서 하나의 예술품인 아름답고 경이로운 노트들을 엿보는 것은 어떤 명화를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다. 행간이 커지고 글자가 힘을 잃어갈 때 한번 더 힘을 내서 글씨를 바로 세우고 행간이 촘촘한 노트를 다시 쓸 수 있게 힘을 주는 뛰어난 노트들을 떠올려 본다.
먼저 내 친구 현수의 아이디어 노트이다. 현수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친구로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고, 그때는 나 역시 현수와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학교 대표로 그림 대회에 나가면 현수가 글쓰기 대회를 나간다든가, 현수가 수학 경시대회를 나가면 내가 과학 경시대회를 나간다든가 또는 반대로 되거나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뭐든 즐겁게 잘하는 꿈나무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 다시 만난 현수는 두꺼운 노트를 들고 있었다. 꼼꼼하게 기록된 페이지를 살짝 엿보았을 때, 내가 그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중요한 무언가가 그 페이지에서 반짝 빛났다. 그 노트는 어릴 때의 재기 발랄하던 모습이 성장하여 맺은 하나의 열매처럼 상징적인 물건으로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수는 세계적인 앱 개발자가 되어 공중파 뉴스에 나타났다. 글로벌한 인재로 세계적인 작가들과의 콜라보로 바빠진 현수는 부러움과 거리감을 주면서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특별함을 꽃피워냈다. 어릴 때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창의력이 꽃피워지거나 멈추는 차이를 아프게 생각하면서, 슬쩍 엿보면서 경탄해 마지않았던 현수의 노트를 떠올린다.
또 하나의 노트는 봉준호 감독의 스토리보드다.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난 뒤 충격에 빠져서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멍하게 보냈다. 영화가 끝나고, 시작할 때와 같은 봉준호 감독의 시그니처 음악이 울려 퍼질 때 무서웠다거나 재미있었다거나 하는 어떤 감정으로도 쉽게 표현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오후 내내 영화 속 곳곳에 포진되어 있던 미장센과 주제의식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이 들었다. '장르가 봉준호, 봉준호가 장르'라는 말이 실감 났고, 배우들의 연기, 배경 음악, 소품 하나하나의 디테일에 섬세하기 때문에 봉준호와 디테일의 합성어로 '봉테일'이라는 신조어가 있다는 말에도 수긍이 갔다. 이후에 영화 <기생충>을 만들기 위해 봉준호 감독이 직접 그린 스토리보드 집을 구입하게 되었고, 그 스토리보드의 섬세하고 치열한 구체성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새로운 노트를 시작할 때마다 첫 페이지에 ‘Tell me’라고 썼다고 한다. 자연의 섭리, 속성, 비밀과 같은 것을 나에게 말해달라는 의미로 내 의지로 성실하게 채워나감과 동시에 자연의 섭리에 나를 열어두는 자세가 성장하는 자의 멋진 태도로 느껴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중적으로는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화가 이전에 과학자, 철학자, 공학자, 연극 기획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아주 다양한 열정과 관심사를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꼬박꼬박 기록하는 습관을 평생 유지, 발전시켰고, 현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연구자들에게 완성된 그림보다 완성되지 않은 노트 속의 아이디어와 스케치들의 가치를 더 높게 인정받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명성에 비해 작품이 많지 않은 편인데 그 이유가 완성보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완벽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비행, 물, 해부학, 예술, 말, 기계, 지질학……, 끝없는 호기심을 가진 탐험가로의 면모가 가득 담긴 노트들은 장르를 넘나드는 통섭의 시대인 현 인류에게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데이터를 가진 자가 돈을 버는 이른바 데이터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눈만 뜨면 온갖 정보들로 넘쳐나는 월드와이드웹의 물결을 감당해야 한다. 물살에 휩쓸릴 것인가, 물살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즐길 것인가 중요한 귀로에 놓여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선택하고 더 소중하게 여기고 더 가치롭게 다듬어 가리라 마음먹는 것은 손으로 쓰고 그리는 아날로그 노트다.
‘대도해를 완성했을 때는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불안도 후회도 없습니다. 대도해가 말이라는 보물을 가득 싣고 큰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 생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생을 바친 사전 ‘대도해’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마쓰모토 선생이 사전편집부에 남긴 편지의 일부다.
꿈이든, 기억이든, 신문에서 본 세상의 한 단면이든, 산책 길에서 들은 이야기 한 조각이든 내 안의 오래된 텍스트를 깨워내어 끊임없는 고쳐 쓰기를 통해 세상과 모호하게 뒤섞인 나의 언어를 하나씩 천천히 새롭게 정의해 나가는 것으로 나 자신을 알고 세상과 만나는 거점으로 만들 생각이다. 거친 세상의 파도에 맞서 나를 세우고 지키고 살리는 무기로 삼을 요량이다.
말라 있는 단어의 씨앗들에 흠뻑 물을 주자.
차분하게 싹트기를 기다리자.
농부의 마음으로 나만의 단어를 수확하자.
나의 단어를 물로 가득 채우자.
물 주자. 키우자. 피우자.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