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요일별 연재 브런치북>이라는 텍스트가 눈에 들어온 이후, '그거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써둔 글들을 살펴보았다. 관심사가 일관되지 않고 들쑥날쑥한 삶을 살아온 업보로 글도 주인장을 닮아 일관된 주제로 추리는 것이 난제였다. 하루는 이 걸해 볼까? 다음 날은 저 걸해 볼까? 좌충우돌 흔들리고 있던 중이었다. 신문을 읽다가 음식 배달 앱 별점 후기를 조작한 사건에 화가 났다. 마케팅 업자가 식당 주인에게 건당 5,000원을 받고 가짜 리뷰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은 요즘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인 수많은 허위 식당 리뷰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조작 사기 사건이 어찌나 많은지 '탈진실'이라는 단어가 피부에 와닿는 시절이다.
탈진실(Post-truth)이란, 객관적 사실보다는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오늘날의 시대상을 말하는 현상으로 옥스퍼드대학이 선정한 2016년 그해의 단어라고 한다. 시쳇말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 아닌가? 요즘 유튜브 개인 방송들을 보면 정도가 지나친 내용들이 시시각각으로 쏟아져 나온다. 팩트체크 되지 않은 허위 정보와 딥페이크, 알고리즘 조작, 표절 시비 등 무질서의 쓰나미가 잦아들 기미도 없이 점점 더 거세지는 추세다.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고 속여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거짓말과 사기가 난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급변하는 세상을 온전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상황은 안되는데 만연하는 각자도생의 키워드에 압박을 느껴서 초조해하다가 저지르는 악은 아닐까? 어딘가에서 '자유'란 '자기 이유'라는 기발한 뜻풀이를 보았다. 그런 자유, 그런 자족(자기만족)이 없기 때문에 생긴 생존에의 불안이 만든 현상이 아닐까?
4/4분기에 접어들면서 2024년의 주요 트렌드가 될 키워드를 뽑은 <트렌드 코리아 2024>가 출간되었다. 그중 '육각형 인간'이라는 신조어가 눈에 들어왔다. 육각형 인간이란, 여섯 개 축 즉, 외모, 집안, 직업, 자산, 학력, 성격의 그래프에서 각 기준 축이 모두 꽉 채워진 상태로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춘 완성형 인재를 말한다. 얼마 전부터 금수저, 흙수저 하며 현대의 신분제를 뜻하는 단어가 유행하더니 육각형 인간은 그 정점을 찍는 것 같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라고 여겨지던 '노력형 인간'이 주목받지 못하고 '타고난 환경'이 인정받는 시대가 도래한다니 참으로 힘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만 다행히도, 대표 저자 김난도 교수는 인간의 '스스로를 볼 줄 아는 능력', '인문학적 능력', '아날로그적 성찰'을 강조한다.
탈진실 시대의 초격차 양극화 사회에서 육각형 인재가 아닌 자로서도 불안하지 않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세파에 휩쓸리지 않을 나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세울 것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탈진실 시대, 육각형 인간이 아닌 자로서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세울 것인가?' 씁쓸한 기분으로 되뇌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신문에서 화가 박서보 선생님이 생전에 했던 말씀을 마주하게 되면서였다. 수행하듯 반복해서 선을 긋는 '묘법' 연작으로 유명한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대가 박서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단색화는 수행을 위한 도구이며, 행위의 무목적성과 무한반복성이 이뤄낸 결과물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
"흙수저로 자라도, 외국 유학 못 가도 '진실한 내 것'이 있으면 언젠가 인정받는다."
"사람들의 분노와 고통을 흡인지처럼 빨아들이고 편안함과 행복의 감정만을 남겨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세상이 달라졌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도태된다는 구호가 만연하는 불안의 시대에 '진실한 내 것'이 있으면 된다는 거장의 말씀을 읽고, 메뉴의 이름이 복잡해서 주문하는데도 긴장해야 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뜨끈한 국밥 한 그릇 잘 먹은 듯이 속이 든든했다. 맞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세계적인 석학이 뭐라고 하든, 나에게 친절하면서, 나를 믿고 사랑하면서 힘껏 살아가는 도리 밖에 없다. 박서보 선생님의 '진실한 내 것'으로의 연필을 바라본다.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쌓아온 것들을 돌아본다.
아래의 사진들을 소개해 본다.
첫 번째 사진은 펼쳐놓은 꿈일기 장 위에 낙서하듯이 펜을 잡는 검은 실루엣의 사람을 그려 넣었다. 이 사람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아이'같아 보인다. (내가 그렸지만 '같아 보인다'라고 한 것은, 그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렸는데 지금 들여다보면서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나를 분석하자니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내면아이는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인해 자라지 못한 미성숙한 자아를 뜻한다. 내면아이가 미해결 과제인 상처받은 내면의 감정을 직면하기 위해 꿈을 기록하려고 펜을 들고 있다. 작품 제목을 정해 본다. <펜을 들자! 무엇을 위해서? 성장을 향해서!>
두 번째 사진은 지금 쓰고 있는 꿈일기장과 펜과 어둠을 밝혀줄 조명, 이른바 '꿈기록 삼종세트'다. 이 정도는 일부러 준비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있는 것이니 꿈일기를 쓰고자 한다면 잠자리 머리맡에 요렇게 준비해 두면 되겠다. 참, 사실은 꿈기록은 사종세트가 필요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꿈을 꾸겠다는 마음'이다. 이 마음가짐이 갖춰지지 않으면 고급 양장 노트나 비싼 펜, 눈부심 방지 LED 램프, 아무리 성능 좋은 녹음기를 준비해 두어도 꿈은 보이지 않는다. 잠들기 전의 상태도 잠의 퀄리티와 꿈에 영향을 미친다. 가능하면 하루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쾌적한 몸과 마음의 상태로 잠을 맞이하면 좋겠다. 특히 잠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다가 잠이 드는 습관은 반드시 고치는 것이 좋다. 이미 습관이 들어있는 경우, 고치기가 쉽지 않다. 뇌가 이미 도파민에 중독이 되어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꿈일기를 쓰고자 한다면, 그렇지 않다 해도 잠의 질을 높여 삶의 질을 개선하려면 잠자리에서 스마트폰 보는 습관은 반드시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방법으로 비행기 모드로 설정해서 손이 닿지 않는 위치에 뒤집어 두는 것을 추천한다.
세 번째 사진은 2012년부터 현재까지 12년간 써오고 있는 꿈 일기장들이다. 한 권을 다 채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다보니 깨끗하게 보관한다 해도 귀퉁이가 낡았다. 고대의 현자들부터 현대의 유수한 미래학자들이 쓴 스테디셀러들과 서점 판매율 1위 베스트셀러로 가득한 책장 한편에 있는 낡은 꿈 노트들이 나에게는 최고의 가능성의 보고다.
아래의 사진은 위의 사진에 이런저런 잡동사니 이미지들로 꼴라주해본 것이다. 역시 작품 제목을 지어본다. 재미로!
첫 번째 작품 제목은 <물 주자, 키우자, 피우자, 야!> 힘찬 구호로 정해보았다.(사실 이 구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조 구호였다.) 꿈은 보이는 이미지 그 자체로의 의미보다 그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내 기억과 감정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 핵심이다. 그로부터 얻어지는 감정을 마치 배양하듯이 잘 간직해서 의식적인 삶 속에서 통찰하고 연결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꽃이 씨앗이 아니지만 씨앗에서 나왔고, 열매가 꽃이 아니지만 꽃에서 비롯되었듯이 말이다.
두 번째 작품 제목은 <우리 자신의 땅을 돌본다면 언젠가 그 땅의 일부가 될 것이다>로 정해 보았다. 원래는 <펜을 들자! 무엇을 위해서? 성장을 향해서!>로 하려고 했는데, 꼴라주 작업 전의 그림에 그 제목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제목이 필요했다. 꿈은 또 하나의 영토다. 우리가 모르는 무한대의 미개척지다. 자신에 대해 진지한 관심의 열쇠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신비와 사랑의 땅이다. 나의 꿈을 돌본다면 언젠가 내 꿈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꿈 작업을 해온 결과, 당신은 무엇을 이루었나요?' 혹시 이런 질문을 가진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꿈을 꾸고 기록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꿈을 꾸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기록하게 한다. 꿈의 세계, 그곳에는 포효하는 코끼리와 전설 속의 불사조와 유니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괴한 난쟁이와 무서운 해골, 위험한 낭떠러지, 더러운 오물도 넘쳐난다. 꿈의 이미지가 모두 꿈꾸는 자의 투사체라고 할 때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뿐 아니라 끝없는 추락의 가능성도 모두 다 보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과 삶의 조건들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꿈 작업을 시작할 때의 첫 마음처럼 손에 쥐어진 성과나 내놓을 만한 성공담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절대 긍정'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꿈은 이미지의 세계다. 오래전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문자는 모두 그림, 이미지였다. 글 이전에 이미지가 있었다. 이미지에 대한 느낌은 삶에 대한 느낌이다. 나 자신의 신체, 정신, 언어에 대한 느낌, 나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한 느낌, 내가 겪은 사람들에 대한 느낌, 과거의 기억에 대한 느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느낌... 삶은 느낌으로 이루어져 있고 느낌은 이미지에 대한 느낌이다. 어떤 이미지를 어떻게 느끼느냐는 생명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이미지에 대한 느낌을 새롭게 하는 일은 빈약한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창의적인 예술활동이다.
<RED BOOK>에서 칼 융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