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글쓰기

-생애 첫 마라톤 대회 추억담

by 오렌


동네 하천을 따라 달리기를 할 때였다. 달리기를 통해 건강한 몸과 마음의 변화를 느끼게 되어 좋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마라톤 대회에도 관심이 갔다. 내친김에 한번 나가보기로 신청을 했다. 선수처럼 훈련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달려왔으니 10킬로 완주쯤이야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가질 필요 없으니 그저 시간 내에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가벼운 마음을 먹기로 했다.

대회당일,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운동화 끈을 조여 매었다. 출발선으로 걸어가자 어디가 출발선인지도 모를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로 한 마음이 갑자기 예리하게 날이 섰다. 군중 속을 헤집으며 대열에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선두 그룹은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너무 뒤처지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앞으로 전진하게 만들었다.


"탕!"

화약 총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은 "와~!" 함성과 함께 즐거운 분위기로 출발선을 통과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동안은 이게 달리기 대회인지 걷기 대회인지 모를 혼돈의 상태가 지속되다가 선두 주자들이 페이스를 잡자 사이 공간이 확보되면서 비로소 달리기 대회의 면모가 갖추어졌다. 넓혀진 공간 사이로 주말의 싱그러운 공기가 온몸에 감겼다. "이런 거구나!"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군중 속에서 함께 달리는 기분은 첫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나의 몸과 영혼을 활짝 열어주었다.


유쾌하고 신선한 공기는 너무 빨리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허공을 가르는 한 마리 날다람쥐처럼 가벼워야 할 다리는 뜨거운 아스팔트의 김에 이내 데워져서 너무 빨리 지치고 있었다. 나처럼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한 사람들 중 대열에서 이탈하여 포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눅눅해진 김 마냥 힘을 잃은 다리와, 그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붉게 달아올라 빨간 고무풍선처럼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심장도 불규칙하게 쿵쾅거리는 것이 괜한 객기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면(그것도 고작 10킬로에서!) 참담한 말로가 될 것이었다.

‘누가 아는 것도 아니고,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조용히 빠져서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그건 아니지. 누가 아는 것도, 완주한다고 인생이 달라질 것도 아니지만 시작한 것에 대해서 끝까지 하는 것이 옳아!’ 마음속 두 목소리가 갈등을 일으켰다.


일단 시작한 레이스에서 달리는 동안 준비가 덜된 것이 느껴질 때,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포기하는 것이다. 동네 하천을 따라 기분 좋게 몇 번 달린 것을 가지고 참가한 것에 대한 판단착오를 인정하고 좀 더 구체적이고 성실한 연습을 한 후, 다음 대회를 기약하는 것이다. 또는 그저 이어폰을 끼고 마음에 드는 아무 음악이나 골라 들으며 동네 하천을 여유 있게 걷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이럴 경우 팔을 휘두른다거나 뒤로 걷는다거나 슬쩍슬쩍 춤을 춘다거나 팽이처럼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아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또 하나의 방법은 현실의 장벽을 느끼면서 죽기 살기로 끝까지 뛰어보는 거다. 이 역시 끝나고 나서의 행보는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실제에서 필요한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훈련을 거쳐 더 나은 모습으로 출전하는 것과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굳이 재도전하지 않고 달리기가 아닌 다른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싶으면 이왕 내친 것은 한 세트로 되어있는 전 과정을 완주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포기하든, 끝까지 해보든 이후의 행보는 다시 하는 것과 안 하고 다른 것을 하는 것. 두 가지 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중도에 포기하면서 다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 보다 끝까지 완주한 후 다음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다음 길을 더 자신감 있게 활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감, 자긍심이다. 그 속에 있을 때는 뭐가 뭔지 모르지만 고통 속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효능감, 믿음, 기쁨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으로 판단한 사람에 비해 온몸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피와 근육과 신경, 온몸의 세포가 그 정보를 저장해서 다음을 준비하는 거름이 되어준다. 그렇게 되면 다음을 준비할 때도 더 실제적인 필요를 알게 되고,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 다른 일을 한다 해도 그 거름이 양분이 되어 한 번도 안 해본 일인데도 이상하게 잘하는 사람이 된다.


벌써 10년도 더 된 마라톤 참가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린 것은 소설을 쓰면서 느끼는 마음과 달리기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왜 그렇게 글쓰기와 마라톤의 병행을 강조하는지 저절로 알겠다. 골자는 반복, 습관, 연습, 훈련이다. 어제, 2시간 동안 3,000자의 글을 쓰고, 2시간 동안 75페이지의 책을 읽었다. 앞으로 한 동안은 이런 식으로 시간과 분량을 정해놓고 읽기와 쓰기를 연습하려고 한다.

어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던 중 글쓰기에 있어서 내가 잘하고 있는 점과 모르고 있는 점, 몰라서 힘들게 여겨졌던 점 등 다양한 포인트를 알게 되었다. 특히, 지난번 첫 책을 쓸 때의 수많은 갈등의 요인들이 비로소 이해되는 지점들을 여럿 발견했다. 사실 처음에는 소설을 쓸 작정이었다. 분식집에서 마감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꿈에 나왔던, 어묵 통에서 기어 나온 거북이 꿈을 소재로 SF 판타지를 쓰고 싶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같은 동선에 따라 기계들을 세척하기 시작했다. 어묵 통 쪽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묵 통에서 거북이가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거북이를 바라보았다.’


실제 매일 청소하는 공간과 그 공간에 출연한 신령스러운 거북이 꿈을 연결한 이 세 문장을 가지고 소설을 쓸 참이었다. 확실하게 구상된 이 세 문장 말고도 꿈의 여러 가지 상징적 이미지들과 다양한 경험과 글쓰기 근력이 있으니 일단 시작하면 머리와 손과 눈이 협업하여 물 흐르듯이 뭔가 줄줄줄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욕망이 이스트 넣은 식빵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을 때, 오랜 시간 해온 생계밀착형 아르바이트를 모두 접고 집중집필의 시공간으로 은둔했다.


글이 써지기는 써졌다. 이른 아침부터 커피와 함께 시작한 글쓰기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계속되었지만, 하루 종일 쓴 글을 늦은 오후가 되어서 읽어보면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불만족스러운 문장 노동이 계속되자 그토록 쓰고 싶었던 글이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가 손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때의 일념은 책을 쓰기로 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문자화된 생각인 책이란 것을 오랫동안 고쳐 쓰고 검토하여 마음에 들게 된 것을 신중하게 세상에 발표해야 한다는 모종의 사명감이랄까,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일단 부풀어 오른 생각을 검열 없이 쏟아내고 나서 차츰차츰 더하고, 덜어내고, 윤곽을 잡아나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진행 자체가 너무 더디어지면 글이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냥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누가 말해준 것도, 글을 쓰면서 작법에 대한 책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느낌에 의존하여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 생각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원래 써오던, 내가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의 문체로 전환해서 써나갔다. 그러다 보니, 부분적으로 소설의 형식을 의식하면서 쓴 부분과 일상적인 수필식의 글이 혼재되었다.


글을 쓰면서 만족스러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부족함을 느낄 때는 더 공부하고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도 하면서 해나갔다. 출간 후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소설은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10킬로미터를 달린 사람이 10킬로 마라톤은 한 번도 참가하지 않고 곧바로 42.195킬로의 풀코스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림으로 치자면 10호짜리 그림만 그리던 사람이 처음으로 그린 100호짜리 그림을 공모전에 출품하려고 한 것이고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100호는 하나의 목표이다. 그림에 대한 의지의 상징적인 숫자인 것이다.

오랜 세월 달리기를 해온 사람에게는 42.195킬로미터가 의지의 상징적인 숫자가 된다. 음악으로 치자면 전 악장을 연주한다든가, 판소리로는 완창을 한다든가. 한 분야에 대한 열정과 의지의 도전인 것이다.

꼭 그렇게 큰 규모에 도전하지 않아도, 매일의 산책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작은 감성들만으로도 충분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 꺼지지 않는 불꽃은 스스로 태우는 것만으로 꺼뜨릴 수 있다.


이후, 중도에 포기했던 소설에 대한 열망은 다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을 통해 소설의 구성과 인물 설정, 시점, 플롯 등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정말 소설이란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소설을 쓰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사실들과 꿈의 이미지들, 매일 꾸준히 조금씩 글을 써온 문장력 등이 소설을 쓰겠다는 의지가 되어주었고, 그것은 소설 작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가장 중요하고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나만의 것이라는 점은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없기는 하다) 기둥이지만, 그 기둥이 집이 되게 하기 위해서 벽을 올리고, 바닥을 평평하게 하고, 지붕을 만드는 등의 세부적인 기술은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따끈한 공기가 선선한 바람으로 바통 터치를 하는 9월 초, 모처럼 찾은 도서관에서 읽는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은 너무도 살갑게 착착 감기듯이 와닿았다. 지난 4개월간의 고군분투가 피와 살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란 걸 금방 알았다. 눈알이 빠질 듯이, 손가락이 굳을 듯이 하루 종일 한 문장 노동에서 느꼈던 수많은 실망과 좌절이 저절로 질문이 되었고, 그것이 이스트가 되어 밀가루인 피와 살에서 발효되어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책에서 보이는 모든 실수와 그에 대한 대책, 비법들이 다 내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부풀어 올라있는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내어 다양한 모양의 빵을 만들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밀가루에 이스트만 넣는 것보다 달걀흰자를 풀어서 넣거나 바닐라 향을 넣음으로써 빵이 더 부드럽고 향기로워진다든가, 오븐의 온도를 하나로 설정해 두기보다 처음과 중간, 마지막을 섬세하게 조절해 준다든가, 다 구워진 빵이 그 특성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장식을 한다든가…, 모든 일련의 과정이 더 구체적으로 세부적으로 분화될 것이다. 그 안에서 점점 더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압도되기도 할 것이고, 넓고 넓은 판타지의 세계에 초대된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제한 글쓰기에 다시 착수한 어제, 2시간 동안 3,000자를 썼다면 오늘은 5,000자를 썼다. 의식의 범주에 개입시키느냐 그냥 내버려 두고 마음 편하게 하느냐는 확실한 차이로 드러난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앞으로의 내 생활은 글쓰기와 달리기로 단순화될 것 같다.

하루키를 따라 하는 것처럼 되었는데, 굳이 해명을 하자면 첫 째, 글쓰기와 달리기의 조합은 하루키뿐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이 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는 것과 그 정보를 알았다고 한 번 만에 ‘나도 합류!’ 하는 식으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그래도 되지만), 나름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았을 때, 나에게 가장 맞고 가장 건강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루키를 따라 하느냐, 독창적으로 하느냐도, 해명도 변명도 아닌, 진짜 할 수 있느냐이다.


마라톤의 결말을 말하지 않은 것 같아서(궁금해할 독자를 위해) 밝힌다. 10킬로를 넉넉하게 완주했고, 주최 측에서 제공한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먹고 힘을 내어 집으로 돌아왔다. 마라톤을 주최한 신문에 완주자 명단이 실린 바, 가끔 내 이름을 검색해보면 마라톤의 경력이 살아있어서 추억을 떠올려 이 글도 쓰게 되었다.

이후로 달리기에 대한 행보는 대회 참석과 같은 전문적인 방향이 아니라 동네 시냇가를 활보하는 자유 걷기과 근력운동으로 전향했다. 본격적인 글쓰기와 함께 달리기의 방향이 어떻게 진화할지는 내 인생에서 아직 미개척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어떻게 알겠는가? 이 추억담이 또 다른 효모가 되어 20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최고령 참가자가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