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호호 할아버지

by 오렌


겨울비 내리는 목요일. 올해 가지 못해서 아쉽게 생각하고 있던 도서관에 갔다. 주변에 식당이 없었던 점을 생각해서 식당에 들러서 밥을 사 먹고 심하게 부른 배로 마을버스를 탔다. 모처럼 온 아담하고 정갈한 구립도서관은 내가 좋아했던 면모들을 유지한 채 나를 맞았다. 현관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있는 휴게실에 먼저 들어갔다. 배도 꺼뜨릴 겸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오늘의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백열 조명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인 카페 분위기의 휴게실 여기저기에서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고 있는 학인들이 보였다. '참, 도시락! 도시락이 있었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식사의 형태를 떠올리고는 다음번에 올 때는 도시락을 싸와야겠다 싶었다.


휴게실 한쪽에는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노트북 옆에 <소설 쓰기 바이블>이 놓여있었다. 오색찬란한 플래그가 덕지덕지 붙은 채. 소설을 쓰나 보다. 무슨 이야기를 쓰는지 뒤에서 슬쩍 엿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립던 도서관표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마시자 비로소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복도에 늘어선 신문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해 가며 한 번씩 훑어보고, 그 옆에 있는 손소독 기계에 고양이처럼 두 손을 넣어서 시원하게 소독을 했다. 뒤돌아서서 반대편 벽에 붙어있는 게시판에 겨울방학 프로그램이며 일요 영화 상영회며 전자책 무료 대여 서비스 안내며 다양한 소식들이 붙어있었다. 도시락에 이어서 '참, 이런 게 있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도서관의 자잘하고 친절한 기억들이 연결되면서 감탄사가 연발했다.


오늘 계획은 각층 각실마다 돌아다니면서 내가 오지 않은 동안 달라진 점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잠자는 도서관 세포를 깨워야겠다고 전략을 세웠다. 각층의 각실을 구석구석 탐방하고 있자니 내가 도서관장이라도 된 것 같았다. 비가 오는 평일이라서인지 사람이 적어서 더욱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열람실을 열어보니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각자 자신의 목표를 향해 집중하고 있는 열의가 진지하게 느껴졌다. 히터 때문인지 그곳의 열의 때문인지 공기가 답답해서 열람실을 금방 빠져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종합자료실에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왔던 때 관심을 끌었던 책 더미 쪽으로 저절로 걸음이 옮겨졌다. 민음사 문학 전집이다. 다 읽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 책 저책 펼쳐보았던 기억이 마치 전생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연결되었다. 작고 얇고 사탕처럼 알록달록 예쁜 표지의 시집들도 스르륵 훑어보았다. 두꺼운 자연과학 책들은 여전히 저 먼 우주의 별처럼 동경의 대상으로 반짝였다. 이쯤 되니까 나는 도서관을 정말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은 나의 감각을 자극하고 과거의 기억을 연결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욕망을 깨운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어린이 자료실이었다. 오늘 도서관에 오게 된 원래의 목적은 쓰고 싶은 동화가 있어서 자료를 찾고 싶어서였다. 보통 때 같으면 어린이들로 북적였을 텐데 비 때문인지 사서들 세 명 만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컴퓨터로 책을 찾아보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다양한 종류의 어린이 책들을 마구 폭식했다. 찾던 책들 중 한 권의 보관 장소가 유아실로 되어 있어서 유리 부스로 칸막이가 되어있는 유아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회색 운동화가 하나 보였다. 누가 있나 보다. 들어가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머리가 백발인 호호 할아버지 한분이 앉아 계셨다. 유아실이라 미취학 아이들의 체형 비율에 맞게 아주 낮은 밥상 같은 테이블에 앉은뱅이 의자로 되어있는 곳에 할아버지 한분이 앉아서 그림책을 읽고 계셨다.


오! 이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장면이었다. 나는 책 찾기를 멈추고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서 할아버지를 흘끔흘끔 보면서 관찰했다. 마르고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쓰신 백발의 할아버지는 그림책을 읽으시면서 혼잣말로 뭐라고 하셨다. 궁금해서 숨을 죽이고 들어보았다. "아이고, 그러면 안 되지.", "하! 그렇구나!", "그런 게 있었네!"...... 그림책 내용에 대해서 마치 대화하듯이 독백을 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하하! 예끼 이놈아!" 하시면서 소리 내어 웃기도 하셨다. 한 권을 다 읽은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책을 꽂고 또 다른 책을 골라서 같은 방법으로 읽기와 말하기, 웃기를 반복했다.

내가 유아실에서 나와서 자료를 찾고 읽는 동안 꽤 오랜 시간 계셨다. 할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유아실에는 할아버지 밖에 없는데...... 일어나서 유아실을 살짝 들여다보니 할아버지가 꼿꼿하게 앉은 자세로 코를 골면서 졸고 계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유아실의 주인공다웠다.


할아버지가 나가시면서 사서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사서들이 일동 기립했다.

"늙은이가 자꾸 와서 하루 종일 있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어르신, 비도 오는데 대단하셔요."

"빗길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훈훈한 인사가 오갔다. 늘 오시는 분인 모양이었다.

그림책과 노인이라는 조합을 생각할 때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장면, 또는 노년의 작가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쓰고 그리는 장면이 연상되기 쉬운데, 그림책을 읽고 즐기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림책을 읽으시는 호호 할아버지는 내가 빌드업해 가고 있는 천국의 도서관에 중요한 인물로 캐스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