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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r 21. 2024

물의 그림

-젖은 그림을 그리며


한동안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면서 검은색 굵은 네임펜으로 선명하게 선을 딴 캐릭터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다가 다시 수채화 작업을 하면서 그림에 대해, 그림의 재료에 대해, 선에 대해, 색깔에 대해, 물에 대해, 빛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스타일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강한 선으로 그린 드로잉은 의지를 강화하는 데 더 특화되어 있고, 물을 사용해서 색깔이 번져나가도록 그리는 수채화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한 모퉁이 햇볕이 잘 드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젖은 그림(wet painting)을 그렸다.

젖은 그림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수채화와는 좀 다르다. 수채화는 종이 위에 물에 적신 붓으로 팔레트에 짜둔 고형의 수채물감을 찍어서 칠한다면, 젖은 그림은 종이 자체를 물에 적셔서 젖은 종이 위에 물에 탄 액체 상태의 물감을 칠한다. 그러니까 일반 수채화보다 물기가 훨씬 더 많은 그림이다.


이렇게 하는 교육적인 이유는 부드럽게 번지고 섞이고 융합되는 물의 성질이 어린아이의 의식과 영혼의 상태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7년간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그림을 지도하는 동안 젖은 그림을 싫어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후에 아동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일반 수채화나 아크릴 등 다양한 회화 재료를 실험해 보았지만 젖은 그림만큼의 강력한 감정 전이는 느끼지 못했다.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고 감정에 말을 걸어오는 젖은 그림의 비밀은 물이라고 생각한다.

물 때문에 어떤 미술 형태보다 지도하기 어렵고 나 자신도 그리기 가장 어려운 형태의 그림이었다.

드러나는 효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힘들고 어렵고 기회 비용이 많이 드니, 굳이 수고로운 이 작업을 고집할 이유가 없기도 해서 슬그머니 내 인생에서 사라졌던 그림이었다.


다시 젖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기 힘들고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왜 젖은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어 졌는지 분명해졌다. 좋기 때문이다. 좋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인스턴트 음식을 먹이는 것보다 유기농을 먹이는 것이 몸에 이롭듯이 젖은 그림은 마른 그림보다 의식과 영혼에 이롭기 때문에 귀찮고 힘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다시 물감을 개고 종이를 적시고 붓을 들게 되는 것 같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젖은 그림을 그렸고, 일 년에 한 번 절기 행사로 크리스마스 애드번트 캘린더를 젖은 그림으로 그렸다. 전지에 아이들과 같이 그린 젖은 그림 뒤에 선생님들이 그린 그림 선물을 숨겨놓고 대림절 4주 동안 매일 창문 열기를 했다. 


정해진 순번대로 오늘의 창문 여는 아이가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면 케이크나 곰, 양말이나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색연필로 그린 그림일 뿐인데도 아이들은 한결같이 기뻐했다. 어른인 내 생각으로는 큰 창문 안에 있는 화려한 트리나 산타 그림이 나오면 더 좋아하고 작은 창문 안에 있는 단순한 달이나 사과 같은 그림이 나오면 실망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주 작은 사탕 하나, 리본 하나가 나와도 기뻐했다. 


젖은 그림을 그리면서 물을 생각한다. 아이들을 생각한다. 

물과 아이들은 다루기가 힘들다. 이해하기 힘들다. 

누구나 잘하고 싶고 닮고 싶지만, 아무나 할 수 없고 될 수 없는 열린 비밀이다.

물의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의 기쁨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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