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전시회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결혼 전에 하던 웹 디자인 일은 일이 너무 많았다. 육아를 하면서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아동 미술학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더 큰 세상과의 연결에 늘 갈증을 느꼈고 신문을 보던 중 손톱만 한 그림 한 장에 호기심이 생겼다. 영하의 날씨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소개 글에 나와있는 전시회장을 찾아갔다. 난방도 되지 않는 서늘한 공간 벽에는 액자도 없는 종이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수채화라서 종이가 울퉁불퉁하기까지 한 그림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기운을 뿜어냈다. 관심이 증폭될 즈음 장발에 머리가 허연 중년의 남성분이 나오셔서 그림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본 그림은 영국 발도르프 학교에 다니는 한 자폐 학생의 그림이었고, 전시장에 붙어 있는 그림들은 유치원부터 각 학년별로 분류되어 성장 단계에 따른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고, 이는 각 문명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문에서 본 손톱만 한 그림 한 장이 마치 태풍의 눈처럼 휘몰아쳐 거대한 세계가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정수옥 작가님
인간 이해에 대한 방대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발도르프 교육에의 강렬한 끌림은 곧 교사교육 과정의 공부로 이어졌고, 정기 수업 외에 독서, 그림, 유리드미(음악과 소리를 몸으로 표현하는 동작예술) 등 개설되는 소모임 전부를 다 등록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중 그림 수업에서 오늘 소개하는 정수옥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독일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개인전도 꾸준히 하는 화가셨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지만, 겸손한 자세로 우리들과 섞여서 같이 배웠다. 많지 않은 네댓 명의 학인들이 함께 그림을 그렸고, 그린 그림을 모아놓고 감상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선생님 그림과 옆에 나란히 놓인 내 그림이 너무 못 그려 보였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화가 선생님의 작품을 칭송했다. 그때 정수옥 선생님이 내 그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그림도 좋아요!" 물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서 번진 그림을 보시고는 우연히 살짝 번진 부분이 더 좋다거나, 형태가 일그러져서 망한 것 같은 그림을 보고도 그림은 고쳐서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실패가 없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어떤 그림이든 다 좋다고 하셨고, 그 말씀을 듣고 나면 정말로 그림들이 다 좋아 보였다. 정수옥 선생님 자신은 얼굴을 주로 그리는데 젊은 시절에는 미운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미워도 얼굴에 황칠을 하거나 칼로 긋거나 망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 말씀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무리 미워도 타인의 얼굴을 훼손할 수 없었다던 정수옥 선생님 그림에 나오는 얼굴들은 달님처럼, 보살처럼, 분가루처럼, 부드럽고 환하게 빛난다.
이미경 작가님
우연히 들르게 된 브런치 이웃 이미경 작가님의 그림 한 장에 발걸음이 멈췄다. 빛나는 나무, 그 아래 떨어진 열매들,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기도 하고,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같기도 한 금빛 열매들과 그것을 주워서 막대기에 꿰고 있는 아이 같은 사람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작가님은 이 그림에 대한 글에서 '감나무가 보석들을 토해낸다'는 표현으로 다시 한번 나를 기쁘게 했다. 색연필 그림이 있는 에세이 브런치북 <나의 꽃나무는 어떻게 피어나나>의 다른 페이지들의 그림들도 하나하나 섬세하고 이야기가 가득 들어있어서 쉽게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정성껏 한 땀 한 땀 그리신 그림을 함께 보고 싶은 마음으로 소개한다. 앞으로 감나무를 지나갈 땐 보석을 떠 올리게 될 것 같다.
나는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우리가 길가며 만나는 이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 낡은 세상도 나아지지 않을까?
나는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그리고 우리를 부드럽게 대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복스러울까?
미덥고 정답게 손잡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으로 알게 된다면
인생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는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우리와 더불어 길 가는 이들이
우리 안의 좋은 데를 보아준다면
인생이 한결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우리도 좋은 데 보고 본다면
그건 너와 내게 있는 흠에도
무언가 좋은 데가 있기 때문에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슬기의 길 가며 생각한다면
너는 나의 좋은 데를 알지
나도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작가를 찾지 못한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