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라이너> 8화. 진영예술가
올해 3월에 특별한 업무 제안 메일을 하나 받았다.
소속과 이름을 밝힌 한 미디어 회사 대표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독립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고자 하는데, 스톱모션 애니메이터가 필요해서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1분당 수백만 원의 단가로 총 40분의 영상 제작을 의뢰해 왔다. 내가 지금껏 받아본 금액 중 단연 최고가였기에 가슴이 뛰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효과음은 자기들이 전문이라서 내가 안 해도 되고, 원화 작업과 촬영, 영상 편집만 하면 된다고 했고, 대략적으로 검토해 봤을 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미 있는 콘텐츠를 영상화하는 작업이었고, 하겠다고 결정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포트폴리오를 보낸 적도 없고, 나에 대해 소개하지도 않았는데 그만큼의 큰 비용을 지불하고 선뜻 업무 제안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스팸이나 사기인가 잠깐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유튜브 스톱모션 채널을 운영하던 당시에 서로 알고 지내던 진영예술가님께서 나를 소개했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스톱모션으로 유명하신 진영예술가님께 의뢰를 했는데, 다른 일로 바쁘셔서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다른 스톱모션 애니메이터를 소개해줄 수 있느냐는 제안에 선뜻 나를 소개해주셨다는 설명이었다.
'솜씨가 너무 좋다'는 과도한 칭찬을 하셨던 모양이고, 그래서 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으시고, 진영예술가님께 제안한 금액 그대로 나에게 제안을 하신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지금 출판 예정인 <재생의 욕조> 초기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였고, 책 작업에 대한 의지가 단호했지만, 난생처음 제안받은 큰돈 앞에서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내가 수락하기만 하면 정해진 프로젝트가 끝나면 큰돈을 쥘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고, 돈이 될지 안 될지 보장이 없는 <재생의 욕조>는 그 후에 써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 수락 메일을 쓰려고 하다가 잠깐 멈추었다. 돈도 돈이지만, 그 작업을 하는 6개월가량의 시간과 그 시간이 갖는 의미와 그 이후의 내 삶에 대해,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자 한 나절도 지나지 않아 생각보다 쉽게 답이 나왔다. 하던 일을 계속하기로.
일생에 없었던 큰돈의 제안에 한 나절을 허비하긴 했지만, 기분 좋은 허비였다.
진영예술가님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계에서 매우 유명한 크리에이터다. 뒤늦게, 적지 않은 나이에 절박함으로 뛰어든 그 세계에서 눈동냥을 다니던 시절, 진영예술가님의 영상 두어 개를 거의 비슷하게 카피한 적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라면 왜 따라 하느냐고 반감을 가질 만도 한데, 진영님은 내 작업물에 "예술 작품이네요!"라는 댓글을 달아주시고, 늘 포용하는 자세로 대해주셔서 같은 스톱모션 씬에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든든한 힘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다른 애니메이터 소개해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도, 나에게 별 도움도 안 되는 일이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귀찮은 일일 수도 있는데, 나를 소개해주셨던 일에 대해 감사 메일을 썼고, 서로의 근황을 묻고 답하면서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았다. 브런치에서 진영예술가님을 소개하는 것이 그분에게 어떤 도움이 되지도 않겠지만, 그 마음만은 꼭 기억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또, 그 일이 없었을 때 보다 그 일이 태풍처럼 지나가고 나서, 나의 책 <재생의 욕조> 작업에 대한 애정도 더 커졌다. 뭔가 더 단단해지고 당당해진 기분이었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일이라고 늘 생각했지만, 정말로 돈으로 비교해서도 이겨낸 정신의 산물이니까 말이다.
나는 가끔 어떤 일들은 계산상으로는 도저히 따질 수 없는 무언가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빵 반죽에 넣는 효모처럼, 그 작은 양의 효모로 인해 놀랍도록 부풀어오르는 반죽처럼, 그것을 '선함의 부스러기'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가 나쁜 생각, 고통스러운 실패, 질병, 그리고 상실 등의 위협적인 진공 속으로 빠져드는 대신에 선함의 부스러기를 맛보겠노라고 선택할 때, 우리는 풍성한 선함에 참여하게 된다.
-앤. 배리 율라프 공저. 이재훈 옮김. 신데렐라와 그 자매들 -인간의 시기심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