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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y 03. 2024

마지막 공연

-솔이와의 뒷 이야기



이 글의 비하인드

어쩌다 보니 건강할 결심 30화 마지막 글이 되었다. 어제 연재브런치북 <오랜일기>27화. 블레싱 노래방에서 음악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내 인생에서 음악에 눈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솔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없었고 자연스럽게 첫사랑 솔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그 이야기가 주제가 아니었으므로 너무 길어지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중학교 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를 했는데,  고운로 그 아이 작가님께서 뒷 이야기를 궁금해하셨고, 다음 연재브런치 발행일인 일주일 후에 쓰기에는 텀이 너무 긴 것 같아 오늘 자 발행 글에 엮어 넣기로 했다.

어차피 건강할 결심 연재브런치북은 잡탕이 되어버렸고, 이조차 "조캐조캐" (해조음 작가님 명언) 해석을 하면,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진정한 건강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비전을 살짝 엿보았으므로, 어제의 글에 이은 솔이와의 뒷 이야기로 <건강할 결심> 마지막화를 장식하게 되었다.



건강할 결심의 잡탕화

처음에는 몸의 건강에 대한 책과 자료를 소개할 목적이었고, 5화 까지는 애초의 목적에 충실하게 나아가다가 모닝루틴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몸의 건강에서 정신의 건강으로, 말의 건강함에 대해, 감각에 대해, 상상, 기억, 숫자, 배움, 노래에 대해, 나중에는 브런치 이웃집에 마실 다니다가 작가님들의 새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책소개 페이지까지! '건강할 결심'에 죄다 물어다 놓다 보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아무 말 대잔치가 되어버린 면도 있고,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물어다 모으는 까마귀 집이 되어 버린 것도 같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 마무리하자면, 실제로 우리를 구성하는 복잡다단한 유기체란 것이 그렇게 잡탕이고 혼종이 아니던가. 모든 것에서의 적절함과 균형이 건강이라는 대단원의 결말을 억지스럽게 내리면서 건강할 결심을 맺는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인사는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이제부터, 솔이와의 뒷 이야기는 부록으로 Go! Go!!



마지막 편지

3년 동안 가열차고 줄기차게 써온 편지의 끝. 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오고 있을 무렵, 편지지 위에서만 만났던 솔이에게서 한통의 전화가 왔다.

어릴 적 까불고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아닌, 변성기가 와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청년이 편지가 아닌 밖에서 실제로 만나고 싶다고 했고, 예상에 없었던 돌발상황에 당황한 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자아가 분열되었다. 그토록 그립던 대상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와서 주저하다가 그만 끊고 말았다. 솔이는 나의 반응에 실망을 했고, 마지막 편지를 보내왔다.

과학고등학교에 합격을 해서 멀리 이사 가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나와의 3년 간의 편지가 무척 행복했지만, 실제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은 사랑은 아닌 것 같다는 솔직한 글이 비틀즈를 프린트한 커다란 편지지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지막 편지에 대한 기억을 떠 올리다가 비틀즈 사진을 검색해 봤고, 실물과 거의 흡사한 정사각형의 비틀즈 사진을 찾았다. 흑백인데 약간 그린끼가 있는 편지지를 재현하기 위해 포토샵에서 보정해 보았다.)

솔이가 떠나기 전에 뭐라고 해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얼음 공주가 된 것처럼, 어딘가 고장난 인형이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솔이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고, 비틀즈가 프린트된 마지막 편지가 마르고 닳고 뚫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재회

대학에 입학한 후, 솔이가 sky대학(이렇게 쓰는 게 나을 것 같다)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이가 나와 각별하기는 했지만, 솔이는 모든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만큼 멋진 아이였기 때문에 솔이에 대한 소식은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늘 어딘가에서부터 날아들었다) 나는 여전히 고향 부산을 떠나지 못하고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뻔뻔한 건지,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솔이가 다닌다는 학교 학과 사무실로 편지를 보냈다. 솔이와 연락하지 않은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는 화실에 다니면서 수많은 남사친과 오빠들과 재미있게 잘 지내긴 했지만, 내 마음속에서 남자친구나 사랑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사람은 솔이뿐이었으므로 연락처를 알았을 때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를 보내놓고 무슨 운명적인 선고를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했다. 역시 나의 히어로 솔이에게 답장이 왔다. 너무 반갑다고. 곧 군대 간다고 했다. 전공은 다른 것을 하고 있었지만 좋아했던 음악을 놓지 않고 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휴가 나오면 한번 보자고 했고, 그렇게 어느 봄날, 첫 휴가를 나온 솔이와 만났다.

수년만에 만난 솔이는 나를 보자마자 잊을 수 없는, 참 마음에 드는 말을 했다. '눈빛이 그대로'라고.

어색할까봐 걱정했지만 우리는 만나자마자 금방 웃음이 터졌고 어제 만난듯이 장난을 쳤다. 사흘 연속으로 만나서 영화도 보고, 솔이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는 당구장에 가서 짜장면도 먹고, 그 친구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셋이서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서 기타 치면서 고성방가를 하고, 8차선 도로를 달려 무단횡단을 했다.

술 먹고 긴장이 풀린 솔이는 나에게 '실망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뭐가 그렇게 실망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추측할 뿐이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듯이 쓰다듬으며 "실망이다"만 반복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솔이의 희망이 되고 싶은 게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런 솔이에게 나는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재회 2

사귀는 연인 관계가 아닌데 남녀가 둘이 만나는 것이 불편했는지 솔이는 나를 만날 때마다 누군가 친한 친구를 불러내서 꼭 삼자 구도를 만들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는 솔이는 방학 때나 쉬는 날 집에 올 때마다 부산에 친구가 없어서 심심하다면서 자기 친구 한 명을 옵션으로 대동해서 나를 불러냈다. 나는 학교에서 과제 때문에 밤샘을 한 날에도 솔이 연락이 오면 곧장 달려 나갔다.

패턴은 늘 비슷했다. 추억의 남포동 거리를 돌아다니고, 용두산 공원에서 베짱이처럼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술집으로 갔다. 그리고 또 그 예의 "실망이다"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술에 취한 "실망이다"라는 말이 그토록 아팠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건 아픈 거고 나는 그때 까지도 솔이만 바라보는 진짜 고장 난 인형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사귀고 있었지만 솔이의 연락이 오면 죽은 줄 알았던 모종의 세포가 부활했고, 솔이는 그야말로 변하지 않는 청정 소나무처럼 나에게 푸르른 기운을 주는 존재, 내 안의 문학소녀를, 화가를, 예술가를 불러내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너


바비킴 | 소나무




재회 3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교육대학원을 다니면서 목공예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또 내가 같이 공방을 하고 있는 친구와 세 명이서 같이 만났다. 주말 거리 예술가로 프리 마켓에 참여했던 기억을 담은 <건강할 결심> 28화. 아마존의 추억에도 쓴 에피소드인데, 장사가 잘 안 된다는 말을 듣고는 기타를 들고 와서 공연을 해주기도 했다. 판매에 큰 도움은 안 되었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무엇보다 길거리 음악가와 길거리 화가의 콜라보 같은 낭만적인 한 장면이 만들어져 청춘의 한 페이지를 눈부시게 장식해 주었다.

한날은 무슨 거지 같은 영화감독 코스프레를 하고는 배낭에 16mm 카메라와 생삼겹살과 소주, 집에서 쓰는 커다란 프라이팬과 부루스타 까지 넣어가지고 작업실에 놀러 왔다. 자기가 쓴 시나리오로 단편 영화를 찍자면서 내가 주인공이라고 했다. 몇 번 대사를 연습하고 나서 바로 촬영을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공방에서, 길을 걸으면서 찍었던 말도 안 되게 웃기는 장면들이 생각난다. 사람을 죽여서 비닐을 덮은 거라면서 공방에 있던 나무 덮는 파란 비닐을 끌고 나오라고 시켰고, 그 웃기는 짓을 우리는 밤이 새도록 엄청 진지하게 했다. 감독인 자기가 카메오로 나온다면서 갑자기 "쉬 팔!"쌍욕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다음날 편집한다고 엄청 고생했다면서 비디오테이프를 선물로 주고는 홀연히 서울로 떠났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비디오 맨 뒤 엔딩크레딧에 주인공에 내 이름이, 감독에 솔이 이름이 적혀서 나란히 올라갔다.




재회 4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취업 준비도 안 됐고 해서 보험처럼 생각하고 들어갔던 교육대학원은 적성이 안 맞아서 자퇴하고 공방도 수익이 안 나서 그만두었고, 당시의 벤처버블에 올라타서 웹디자인을 배웠고, 서울에 있는 벤처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때 솔이는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밴드에 열심히였는데, 현실적으로 먹고사는 일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처음으로 솔이보다 내가 더 많이 아는 분야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 처음으로 했던 말이 'IT가 뭔 줄 아느냐'는 것이었다. 'Information Technology'라고 말하자 대단하다고 하면서 자기는 Internet인 줄 알았다며 내가 많이 똑똑해졌다고 감탄했다. 그리고 자기는 플래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플래쉬는 마침 회사에서 다루고 있었던 프로그램이었고, 중학교 이후로 처음으로 불꽃 튀는 공통의 관심사를 찾은 우리는 한순간 어릴 적 뮤즈에서처럼 말이 잘 통했다.

솔이는 보통 남자들과는 달랐다. 일이 너무 많아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게 힘들다고 말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게 힘들면 컴퓨터 뒤에 앉아 있어라'라고 말했다. 위로받고 싶어서 꺼낸 말에 원하는 말을 듣지 못해서 얄밉긴 했지만, 솔이가 하는 말은 깜짝 놀랄 정도로 창의적이고 재미있었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언어를 구사했다. 그러니 남녀 관계로 발전할 길은 아예 차단되어 있었다.

이즈음 솔이는 찐사랑을 만났고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것 같았다. 솔이는 삼자구도를 만들어서 나를 만나는 것을 넘어서서 여친을 포함한 자기들 밴드 모임에 나를 데려갔고, 자기 여자 친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기를 '내가 진짜 좋아하는 친구'라고 했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형이라며 둘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즉석 소개팅을 주선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서 그 밴드 친구들이 당시에 운영하고 있었던 내 개인 홈페이지에 몰려와서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친구가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솔이의 여친까지 내 홈페이지에 와서 '언니'라고 부르며 인사를 남겼고, 나는 그 애의 생일 선물까지 사주었다.




인형의 꿈

솔이 생일날 홍대 한 호프집에서 그 무리들과 모인 날이었다. 술을 마시고 2차로 노래방에 갔는데, 그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찌질한 노래의 대명사 '인형의 꿈'을 불렀던 것이다. (그날의 한심하고 찌질한 선곡은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 그랬니? 제발, 부르지 마! 제발! 안돼! 그것만은~~~ 악~!!!!)



그댄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처음엔 그대로 좋았죠
그저 볼 수만 있다면
하지만 끝없는 기다림에
이젠 난 지쳐가나 봐


일기예보 | 인형의 꿈



이어지는 솔이의 답가로 나는 두 번째 화살을 맞고 말았다. 솔이의 선곡은 바로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었다.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 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전사 직전이었지만 나는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인형의 꿈을 불렀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한 곡으로 임상아의 뮤지컬을 일발장전했다.



내 삶을 그냥 내버려 둬
더 이상 간섭하지 마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세상으로
난 다시 태어나려 해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아
음악과 춤이 있다면
난 이대로 내가 하고픈 대로 날개를 펴는 거야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돼야만 해


임상아 | 뮤지컬



쿵짝쿵짝! 신나는 금영노래방 반주 덕분에 다행히 내 의도대로 사람들이 일어서서 춤을 추고 활발발한 대반전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솔이는 화답으로 김광석의 '일어나'를 불렀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김광석 | 일어나



엔딩곡이었던 대동단결의 노래 '일어나'로 전체 무리들이 일어나서 원을 그리며 어깨를 걸고 춤을 추었고, 한 목소리로 "We can be ONE!"을 외치며 훈훈한 마무리를 했다.

애인이 없는 동안 심심하거나 필요할 때마다 연락을 하던 솔이는 애인이 생기고 나서는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나도 더 이상 십 대가 아니었다. 솔이에 대한 사랑도, 우정도, 추억의 그림자까지 모두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고도 청첩장을 받고는 결혼식에 까지 갔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검색

나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솔이 여친이었던 솔이의 아내가 내 아이의 원피스를 사 보낸 것 까지가 물리적인 연락의 마지막이었다. 나도 더 이상 어린 날의 유치한 집착은 없었지만, 솔이는 어느덧 유명인사가 되었고, 검색만 하면 언제든지 소식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알려 주었으나 나는 멈추어버린 플래쉬 명강사가 되어서 어도비 인기 강연자로 영상이 돌아다녔고, 말만 하면 누구나 알만한 앱을 개발한 세계적인 앱 개발자가 되었다.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콜라보를 했고, 그 작품들이 세계 곳곳의 유명한 큰 빌딩 벽을 장식했으며, KBS 뉴스에 까지 나와서 인터뷰를 했다. 그의 아내가 사회적으로 입지를 다지며 승승장구하는 모습,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검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스토킹 같아서였다. '그냥 찾아보는 건데 뭐 어때?'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역시 그건 집착이고 내 삶에 대한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그 철없고 찌질했던 시절이 후회스럽거나 아프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공연

더 이상 찾아보지 않고, 바쁘게 살면서 생각나지 않았던 솔이가 다시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른 건 유리드미 졸업공연이 임박했을 때였다. 유리드미는 그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큰 산을 오른듯한 일이었으므로 그 결과물인 졸업공연을 솔이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들었다.

고민 끝에 가볍게 연락한 척하면서 공연 티켓을 보냈다. 과천시민회관이라 솔이가 찾아오기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솔이는 늘 그렇듯이 어제 통화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뭐? 유리드미? 그게 뭔데? 춤? 그래. 너 춤 잘 췄잖아. 갈게. 그때 보자."

솔이가 보러 온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마지막까지 정말로 열심히 연습했다. 발레리나 강수진이 된 듯이, 발톱에서 피가 나서 유리드미 슈즈에 피가 베어나오도록.

드디어 공연 날이 되었고, 공연 시간이 다가오도록 솔이가 보이지 않았다. 공연 30분 전부터 무대 뒤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대기실에 왔었는지, 괜객석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대의 막이 올랐고 남편도, 딸도 객석에 있었지만, 나는 솔이가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공연을 마쳤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피날레 작품은 비발디 사계였고, 솔로곡은 쇼팽 녹턴이었다.

솔이는 공연을 마치고도 대기실에 오지 않았고, 나도, 솔이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날 솔이가 공연을 보러 왔었는지, 안 왔는지는 지금까지도 모르는 일이며, 그날 이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무의식

더 이상 연락도, 검색도, 생각도, 언젠가 나중에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던 솔이가 다시 내 안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은 정신분석을 받으면서였다. 무의식은 의식화되지 않은 정신, 의식화되어야 할 정신이다. 채굴하여 가공하면 보석이 될 원석들이 잠들어있는 가능성의 보고인 깊고 어두운 그곳에 솔이의 형상이 가득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의 솔이는 여자의 남편도, 아이들의 아버지도, 세계적인 개발자도, 내 마음을 몰라준 남사친도 아니었다. 무의식 속의 솔이는 나이도 먹지 않은 어린 왕자 같은 모습으로, 작가로, 화가로, 음악가로, 운동 선수로, 과학자로, 성자로, 현자로,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길을 잃은 나를 이끌어주었다. 평생을 마음 졸이며 집착하고 그리워한 솔이는 내 안의 아니무스, 바로 잃어버린 나 자신이었다.




사랑

시간이 흘러 나는 강신주 철학자와 법륜 스님 강의를 들으면서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로 위로를 받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만났지만 손도 한번 안 잡아봤으니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온전히 좋아한 내 마음은 결코 진 게 아니라는 정신 승리는 또렷이 남아, 내가 생산해 내는 01010101 세계 안에서 반짝이며, 분열된 자아의 대동단결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한순간의 꿈이라

남들은 웃으면서 말을 해도

내 마음 모두 바친 그대

그 누가 뭐라 해도 더욱더 사랑해


트윈폴리오 | 더욱더 사랑해




지금, 여기

아름다운 청춘의 한 장

함께 써내려 가자

너와의 추억들로

가득 채울래

Come on

아무 걱정도 하지는 마

나에게 다 맡겨 봐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넘겨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Day6 |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이것으로 비둘기 롤라장과 뮤즈 음악 감상실에서 시작되어 3년간의 편지로 마무리되었던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이쯤에서 솔이와의 뒷 이야기를 궁금해해 주신 고운로 그 아이 작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작가님이 궁금해하지 않으셨다면 이 글은 쓰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글로 쓰지 않았을 때, 그 기억은 쓰기만 한 소주 같았다면, 글로 썼을 때, 달콤 쌉싸름한 향기를 지닌 와인같이 느껴진다. (소주의 참맛을 모르므로 이 표현에 대한 소주 애호가들의 양해를 바란다)


 하나를 알기 위해선 한 번의 아픔이 필요하다

타바코쥬스 해체 당시 싸이월드에 남긴 말이다. 나를 크게 아프게 한 사람은 예외 없이 큰 앎을 주었다.

솔이가 만약 페이지를 보게 된다면 어떻게 말할지 눈앞에 그려진다.


실망이다

솔이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듯이 쓰다듬으며 자주 했던, 너무나 아팠던 그 말, 지금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일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잘 살아라. 잘난 자슥아!




타바코쥬스 | 눈물의 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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