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톱모션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공모전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르몽드코리아 제1회 쁘띠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무드 오렌지 - 작가의 방>을 가지고 왔다.
비하인드
발표가 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로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수상한 참가자들은 고려대 철학과 재학생, 한예종 영화과 재학생 등 대단히 뛰어난 젊은이들이었고, 수상자 중 내가 제일 나이도 많고 뭔가 정체가 불분명한 입장이었다. 물론 이런데 나갈 때는 정체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해서 솔직하게 무직이라거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쓸 수는 없어서 프리랜서 어쩌구 그럴듯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사실상 당시의 나는 백수였다.
심사 결과에 대해 인터뷰 당시에 들었던 바로는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대상으로 선정되었다고 했다. 구두로 들어서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기억에 의존해서 쓰자면, 스톱모션이라는 기법의 참신함과 쨍한 색감이 다른 참가작들에 비해 독창적이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수익화를 목표로 유튜브 떡상을 노리고는, 눈에 걸리는 대로 끊임없이 공모전에 도전했고, 앞뒤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내 쪼대로 작업을 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만약 내가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거 다 재고, 어떤 사람들이 응모하는지 알아보고, 돌다리를 많이 두드렸다면, 고려대 철학과나 한예종 영화과 학생들이 참가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제풀에 꺾여 도전을 멈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 작업을 하던 도중 <오랜일기> 최종 30화. '오랜 날 오랜 밤'에서 말한 20년 전 독자의 연락이 왔고, 그 독자가 말해준 과거의 기억들이 녹아들어 작업을 더욱 즐겁고 풍성하게 만들었던, 특별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갖게 된 작품이다. 아래의 내용은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자매지인 <르몽드 디폴로마티크>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담당 기자님께서 교정을 보셔서 지금 읽어보니 꽤 오글거리는 것 같다.
글을 읽다 보면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까지 생각을 한다고?' 내가 읽어봐도 이상할 정도인데, 사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의식의 흐름대로 그리고 만든 것을, 추후에 시놉시스를 쓰고 작품 설명서를 작성하면서 그동안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끼워 맞춘 것이다. 특히 이 공모전 심사 기준에 인문학적 소양 같은 게 있어서 아는 것 모르는 것 죄다 끌어다 붙이다 보니 현란하도록 현학적 이어졌다.
세상과 단절된 채 네모난 작은 원룸에서 글을 쓰는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불안한 청춘들을 상징한다. 한 권의 책, '마니에르 드 부아르'를 읽음으로써 얻은 새로운 힘으로 환경의 제약과 열심히 자신의 최선을 다하지만 뚫고 나가지 못하는 사유의 갑갑함을 뚫어내어 시원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고 활기찬 일상을 지속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시놉시스
1. 작가의 방
컵을 씻을 시간도 없이 커피를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타성에 젖은 방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불안하다. 유리벽을 만나면 뒤돌아가는 책상 위 금붕어는 좁은 생각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작가의 자아상이다. 번아웃 상태에서 누군가 건네준 '마니에르 드 부아르'는 잠들어 있던 열정에 불을 지핀다.
2. 해변
뜨거운 열망은 곧 작가를 빛으로 가득한 열대 해변으로 데리고 간다. 원시적인 자연의 공간은 역동적이고 유쾌하며 가능성과 잠재력이 가득한 무의식의 공간이다. (구두 신은 무당벌레, 몸이 긴 호랑이는 각각 '마니에르 드 부아르 VOL.2'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년 1월호)'에 수록된 이미지를 오마주 하였다.) 이곳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즐거운 놀이와 사랑, 새로운 관점을 회복하는 것으로만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3. 새로운 방
새로운 힘으로 복귀한 작고 네모난 방은 달라졌다. 나비 떼가 날아간다. 전기주전자의 물은 더 힘차게 끓어오르고, 시들어가던 식물들은 생기를 되찾아 꽃망울을 터뜨린다. 좁은 어항 속을 같은 동선으로 수없이 왔다 갔다 하던 금붕어들은 마침내 유리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의 방, 근심스러운 마음을 상징하는 나비 떼가 갇혀있던 불안한 오렌지는 이제 사랑의 오렌지가 되었다. 눈이 반짝인다. 손이 힘차게 움직인다.
인터뷰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부산에서 프리랜서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인 예정옥입니다. 웹디자이너, 콘텐츠 제작자,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 심리교육 클래스 등 많은 직업을 전전했어요. 재작년에는 작가로서 성호 신인문학상(2019)을 받았고, 저서로는 『우리는 작은 기쁨이다』(2019)가 있어요. 지금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글과 그림의 생산을 목표로 유튜브 채널 <미니수퍼 스톱모션>을 운영 중입니다. 또 바오밥 성장 그림 작가로 활동 중이기도 합니다."
- <쁘띠영화제>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해요.
"유튜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채널을 운영하면서, 뭔가 집중적인 목표를 가지고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동영상 공모전에 응모하던 중 <쁘띠영화제>를 알게 됐습니다. ‘쁘띠’라는 단어도 예쁘고, 50초라는 시간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영화’로서 심사받을 수 있다는 게 여타 다른 공모전과 다른 매력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영화에 로망이 있어서 ‘영화제’에 참여한다는 생각이 창작의욕을 고취시켰죠. 곧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주문해 ‘쁘띠영화’를 제작했습니다."
- 짧은 영상이지만 참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혹 시놉시스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작품설명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가령, 작품의 배경과 등장하는 동물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바다와 동물들은 제 상상 속 세계에서는 중요한 모티브들이에요. 특히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바다는 무의식의 공간을 상징해요. 무의식은 힘의 원천이죠. 또 다른 배경인 언덕은 극복해야 할 삶의 굴곡이자, 균형을 잡고 바로 서야 할 흔들리는 터전이에요. 위태롭고 아찔한 연출을 위해 일부러 롤러코스터처럼 표현했어요."
"그 배경 위를 종횡무진하는 동물들은 색상과 형태, 기능 면에서 각자 특화된 구석이 있죠. 각각의 동물들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성격을 시각적으로, 그리고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매체인 셈입니다. “Go! Go!”를 외치며 돌진하는 기다란 호랑이는 우주의 길목을 지키며 악마와 싸운다는 ‘안남 호랑이’로,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뚫고 나가는 투지를 뜻해요. 깔깔거리는 무당벌레는 웃음으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낙천적인 성격을 뜻합니다. 참고로 호랑이와 구두 신은 무당벌레는 <마니에르 드 부아르> Vol. 2 (문학, 역사를 넘보다)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월호에 수록된 이미지를 오마주 했어요. 이밖에 바다를 가로지르는 고래는 밀물과 썰물을 만들어내는 케플러의 고래예요. 이 고래가 내뿜는 호흡은 각각 밤과 낮, 들숨과 날숨, 노동과 쉼, 일상의 리듬을 상징해요. 화려한 색상의 새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온갖 세상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전령이며, 홍학의 군무는 생명의 역동성을 나타냅니다."
"주인공은 작품 초반 자신의 방에 머물다가 작품 중반에 빛으로 가득한 세계로 건너가요. 이때 주인공에게 오렌지색의 웰컴 칵테일을 전달하는 원숭이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글씨를 쓰고 남은 먹물을 마신다는 상상 속의 동물, ‘먹을 좋아하는 원숭이’에서 착안했어요.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 중 ‘먹을 좋아하는 원숭이’) 주인공은 원숭이가 준 칵테일을 마시고 본연의 생기 가득한 모습을 찾아요. 인간의 지혜를 갈구하는 원숭이는 곧 멋진 남성으로 변형되죠. 이 둘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정신의 미숙함이 성장한 재생, 합일, 부활의 표현이에요.
주인공은 이제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일상의 공간인 ‘방’으로 되돌아와요. 작품 초반에는 어항 속 금붕어가 유리벽에 부딪혀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표현되는 반면, 되돌아온 방의 금붕어는 벽을 뚫고 앞으로 전진하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죠. 이 금붕어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쌍둥이 물고기 '아브투'와 '아네트'로, 신에게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성스러운 역할을 합니다."
- 심오하고도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도 그만큼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혹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작품의 토대를 만들던 중 의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20년 전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당시에 운영하던 개인 홈페이지의 구독자와 우연히 연락이 닿았는데요, 그 독자와 당시 제 개인 홈페이지였던 ‘oren.com’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죠. oren(오랜 or 오렌)은 ‘오래된 것을 좋아하고, 오렌지를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바쁜 현실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의 한 조각을 찾은 것이 무척 기뻤습니다. 그 반가운 추억을 붙잡아 가만히 생각하다가, 문득 ‘오렌지’에서 상상 속 세계의 문을 여는 강렬함을 느꼈어요. 작품 <무드 오렌지> 속 주인공의 방에는 오렌지색 나비 그림 액자가 걸려있는데, 무의식의 에너지의 원천인 상상계로 이어지는 낙조의 오렌지색을 표현한 거예요. 이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강렬한 오렌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 애니메이션 작품인 만큼 제작에 더 큰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니메이션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색연필과 펜과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필요에 따라서 그래픽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물질성이 있는 손그림을 지향하죠. 손맛을 살린 그림을 이용해서 움직임을 만드는 애니메이션 작업이 저의 주특기예요. 특히 스톱모션은 한 장면 한 장면 조금씩 손으로 움직여서 촬영한 수백 장의 그림을 이어 움직이는 영상처럼 보이게 하는 애니메이션이에요. 스톱(stop), 그리고 모션(motion)이라는 이름처럼 움직임과 멈춤의 반복적인 노동이 치열하게 연결돼 만들어지죠.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같은 소재, 주제,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누구와도 같지 않은, 복제 불가능한 나만의 스타일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작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모션 그래픽의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이 아닌 유아스럽고 어색한 움직임, 거기에 덧칠과 중첩 등으로 어디에도 없는 색감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감성이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작품활동의 목적 중 하나는 내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역으로 내 생각을 읽어내는 거예요. 글과 그림을 연동하며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거죠."
- 작품을 제작하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셨나요? 주위의 반응이 궁금해요.
"저는 글이나 그림 등의 창작활동에 착수하면 발표할 때까지 결과물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발표 후의 반응에 대해서는 당연히 숙고해 다음 작품에 반영하지만, 작업 도중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지 않아요. 온전히 내 안에 몰입해 끝까지 밀고 나가고 책임지는 방식을 취합니다."
- 타인의 세상을 곁눈질하기보다 ‘나만의 경험, 나만의 것’을 표현하는 모습이 멋집니다. 여러 직업을 거치신 삶의 풍부함이 글이나 영상 같은 작품세계에도 반영이 됐다고 느꼈어요. 작품 <무드 오렌지>의 영감은 어디에서 왔나요?
"작품의 표면적인 스토리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불안한 청년들을 상징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전적 스토리를 반영하고 있어요. 경험과 사유의 힘이 허약했던 20대, 안개 같은 막막함 속에서 삶의 방향성이 점차 소진돼 갔죠. 일관성 없이 좌충우돌한 인생 역정은 지금에 와서 풍성한 연결점들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확고하고 단단한 중심이 없어 흔들리고 방황한, 소모적인 시간들이기도 했어요.
시원적인 힘의 공간(바다) 속 동물들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역동성, 왜곡되고 과장된 형태와 강렬한 색감은 정신분석을 받으며 실제로 보았던 무의식의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또한 작품 제목인 ‘무드 오렌지’는 좋아하는 영화감독인 미셸 공드리의 영화 ‘무드 인디고’를 오마주한 것이에요. 저는 꿈과 환상의 몽환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초현실주의 미학을 동경하고 사랑한답니다."
- 마지막으로 대상을 수상하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수상은 앞으로의 작품활동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또 인터뷰에서 좋은 질문들을 해주셔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