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삭의 시간> 5화. 말의 침묵으로부터의 발생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 그 충만함은 말속으로 흘러나오지 못할 때에는 그 자체로 인하여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침묵으로부터 발생하는 말은 그 이전에 선행한 침묵을 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신이지만, 침묵이 말에 선행했다는 것이 바로 정신이 창조적인 작용을 한다는 표시이다. 즉 말을 배태한 침묵으로부터 정신이 말을 끌어내오는 것이다.
인간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면 언제나 말은 다시금 침묵으로부터 탄생한다. 말은 그렇게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으로부터 탄생한다. 마치 말이란 다만 침묵을 뒤집어놓은 것, 즉 침묵의 이면일 뿐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상 그것 -침묵의 이면- 이 말인 것이다. 말의 이면이 침묵인 것처럼.
어떤 말속에든, 그 말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여주는 한 표시로서 어떤 침묵하는 것이 들어 있고, 또한 어떤 침묵 속에든 침묵으로부터 이야기가 생긴다는 한 표시로서 어떤 이야기하는 것이 들어 있다.
따라서 말은 본질적으로 침묵과 연관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그는 말이 이제는 침묵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이라는 대자를 통해서 체험한다. 대자를 통해서 처음으로 말은 이제 침묵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제삼자가 있다. 즉 침묵이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말들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좁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먼 곳으로부터, 침묵이 귀 기울이고 있는 그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 대화를 폭넓게 만들어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말은 한층 더 충만해진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침묵으로부터, 즉 저 제삼자로부터 이야기되고, 그리하여 화자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듣는 사람에게 주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대화에서 제삼자의 화자는 침묵이다. 플라톤의 <대화>의 끝 부분에는 언제나 침묵 자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 속에는 그때까지 이야기했던 사람들의 침묵의 경청자가 된 것이다.
천지 창조가 시작될 때 신이 인간에게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고 있다. 인간은 아직은 정말로 감히 말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직은 말을 가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은 자신이 인간에게 말을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말에 익숙해지도록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온 지상에 퍼져 있는 아름답고 힘이 있고 다양한 언어들을 생각해 보면, 언어들 속에는 거의 초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인간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때때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 망가지고, 그 완전성을 침해받았던 무엇인가가." (야콥 그림).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기원도 불가해하다. 왜냐하면 그 기원은 창조주의 완전한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완전한 사랑 속에서 살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언어와 피조물의 기원을 알 수 있다.
불확실하고 멀리까지 미치며 역사 이전적인 침묵으로부터 분명한 한꼐가 있고 철저히 지금 여기 있는 것인 말이 생겼다.
침묵은 이름할 수 없는 천 가지의 형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 소리 없이 하늘로 뻗어 있는 나무들 속에, 남몰래 이루어지는 밤의 하강 속에, 말 없는 계절들의 변화 속에, 침묵의 비처럼 밤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달 빛 속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속의 침묵 속에. 이러한 침묵의 모습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럴수록 이 이름 없는 것들로부터 대립물로서 생기는 말은 더한층 분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침묵의 자연 세계보다 더 큰 자연 세계는 없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자연 세계로부터 형성되는 언어의 정신세계보다 더 큰 정신세계는 없다.
침묵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침묵의 세계성에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침묵의 세계와 말의 세계는 서로 마주해 있다. 따라서 말은 침묵과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적대관계 속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말은 다만 침묵의 다른 면일뿐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
음악의 소리는 말의 소리처럼 침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평행한다.
음악의 소리는 침묵 위를 흘러가듯이 침묵에 떠밀려 표면 위로 나온 것이다.
음악은 꿈꾸면서 소리하기 시작하는 침묵이다.
음악의 마지막 소리가 사라졌을 때보다 침묵이 더 잘 들릴 때는 없을 것이다.
음악은 멀리까지 미치며, 단번에 전 공간을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은 느릿느릿 수줍게 리듬을 통해서 공간을 차지하고, 언제나 다시 같은 멜로디로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음악의 소리는 마치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고, 도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정된 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것, 즉 공간적인 멂과 가까움, 무한과 유한이 음악을 통해서 부드럽게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 영혼에게는 하나의 은총이자 위안이다. 음악 속에서 영혼은 멀리까지 떠돌 수 있고 그러면서도 그 어디까지나 보호받고, 그리하여 안전하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신경질적인 사람들에게 진정 작용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영혼이 불안감 없이 있을 수 있는 어떤 넓이를 영혼에게 가져다준다.
침묵의 세계 | 막스 피카르트 | 3. 말의 침묵으로부터의 발생 (26-30쪽) | 까치
+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연재브런치북 <삭의 시간>은 침묵에 대한 내용이니만큼 댓글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해보는 것으로 침묵과 말에 대한 실제적인 차이를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리처드 용재 오닐 - 섬집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