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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n 09. 2024

두루 넘쳐흐르는 침묵

-<삭의 시간> 6화. 말의 침묵으로부터의 발생 2




5


언어는 단지 세계에 딸린 부속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이다. 언어는 모든 목적성을 초월하는 충만함을 지니고 있다. 언어에는 단순히 의사소통에 필요한 이상의 것이 있다.


물론 언어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속한다. 언어 속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끌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과 기쁨과 슬픔이 있다. 언어는 마치 인간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통과 슬픔과 기쁨과 환희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언어는 자주 자기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시를 짓는다. 예를 들면 언어는 여름새라는 시를 짓는다. 여름새는 언어의 여름을 뚫고 날아가는데, 그러나 보라, 그 날개는 여름새를 또한 겨울을 뚫고 창가의 얼음꽃 -그것은 언어가 그 나비를 위해서 혹한의 겨울에 자라도록 만든 것이다- 으로 데려가며 또한 그 날개는 여름새를 마치 언어의 겨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피어 있는 "5월의 꽃"에게로도 데려간다. 




6


침묵은 말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침묵이 언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침묵, 즉 말없는 침묵의 세계란 다만 창조 이 전의 것일 뿐이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창조일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창조이다. 말이 침묵에서 발생한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 비로소 침묵은 창조 이전에서 창조로, 무역사성에서 인간 역사로, 인간 가까이로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침묵은 인간의 일부, 말의 합법적 일부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리는 오직 말을 통해서만 형태를 지니게 되는 까닭에 말은 침묵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말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고대 그리스인이 인간의 본질을 '살아 있는 로고스'라고 정의한 것은 우연일까? 인간에 대한 그러한 정의를 후세에 이성적 동물,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생물이라는 의미에서 해석한 것은 물론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인간 존재에 관한 그러한 정의가 나오게 된 현상학적 기반을 감추고 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이데거)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온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 침묵은 비로소 완성된다. 침묵은 말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의미와 진정한 가치를 얻게 된다. 말을 통해서 침묵은 야성적인 인간 이전의 것에서 길들여진 인간적인 것이 된다.



언어의 인상학적인 모습은 이렇다. 즉 언어는 침묵의 표면을 뚫고 나온 용암 덩어리들과 같다. 그 덩어리들은 침묵의 표면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누워 있고, 그 침묵의 표면에 의지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바다의 부피가 육지의 부피보다 더 큰 것처럼, 침묵의 부피가 언어의 부피보다 더 크다. 그러나 육지가 바다보다 더 큰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듯이, 바다보다 더 큰 존재성을 가지고 있듯이, 언어는 침묵보다 더 강하다. 언어는 어떤 더 센 존재의 강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7


침묵은 철저히 인간의 본질 속으로 엮어져 들어간다. 그러나 언제나 침묵은 다만 그 위에서 보다 고귀한 것이 나타나게 하는 하나의 토대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침묵은 숨은 신(Deus Absconditus)에 관한 앎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침묵은 사물들과의 무언의 조화로서 또한 들을 수 있는 조화(Harmonie), 즉 음악으로서 존재한다.

인간의 육체 속에서 침묵은 미(美)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미가 단순히 육체라는 물질 이상의 것이듯이, 음악이 영혼 속의 들을 수 없는 어떤 것 이상의 것이듯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이 숨은 신 이상의 것이듯이, 언어는 침묵 이상의 것이다.




8


결코 인간은 스스로 침묵에서 말을 창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은 침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결코 인간이 스스로 침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결코 인간이 스스로 침묵으로부터 말을 향한 도약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침묵과 말 같은 서로 대립되는 두 현상이 마치 서로가 서로의 일부인 것처럼 그렇게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 그것 역시 결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어떤 신적인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말과 침묵의 병존, 그것은 말과 침묵이 하나인 저 신적(神的)인 상태를 가리키는 한 표시이다.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말씀 자체, 곧 그리스도가 신으로부터 -"이 *미만(彌漫)해 있는 침묵"으로부터 -인간에게로 강림한 현상 속에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침묵으로부터 언어로 변화한 것이 예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2,000년 전에 나타난 말(복음)은 이미 태초부터 인간에게로 오는 중이었고, 그 때문에 태초부터 침묵과 말 사이에는 틈이 생겼던 것이다. 2,000년 전의 그 사건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태곳적부터의 모든 침묵이 말에 의해서 파열되었다. 침묵은 그 사건 이전에 이미 흔들리다가 이내 파열되었다.


미 彌 : 두루, 널리, 오래

만 漫 : 넘쳐흐르다



침묵의 세계  |  막스 피카르트  |  3. 말의 침묵으로부터의 발생 (30-34쪽) |  까치




+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 pinterest




댓글 미사용

연재브런치북 <삭의 시간>은 침묵에 대한 내용이니만큼 댓글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해보는 것으로 침묵과 말에 대한 실제적인 차이를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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