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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Aug 16. 2024

알면 사랑하게 된다

-<종이 놀이터> 14화. 인형의 집




어젯밤 꿈에 커다란 보라색 벌레가 나왔다.

자잘한 타일이 빼곡히 박힌 것 같은 무늬에 공작새처럼 널찍한 꼬리가 달린,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비스러운 벌레였다. 크고 징그러운 벌레가 얼굴 가까이에 다가오자 용기를 내서 벌레를 죽이려고 손짓을 했는데, 벌레가 빠르게 뒤통수 쪽으로 날아가서 뒷목을 꽉! 물었고, 실제로 몸에 전기가 통하듯이 움찔할 정도의 강력한 충격을 받으면서 깨어났다. 알람을 맞추어놓은 시간보다 이른 새벽, 생생한 꿈의 충격으로 다시 자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책가방을 챙겨서 늘 가는 무인카페에 갔다.



늘 앉는 자리 테이블 위에 엄지 손가락 만한 연두색 벌레가 한 마리 먼저 와서 앉아있었다. 꿈의 연결처럼. 칼 융이 말하는 *동시성처럼.

(*동시성 (Synchronicity) : 체험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우연한 사건으로, 그 일로 인해 일종의 각성이나 깨달음의 감각이 얻어지는 현상)

벌레를 싫어하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 다른 테이블에 앉거나 아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해충이면 죽이거나 하는 회피와 공격의 방어 기제를 사용했다면 오늘은 좀 다른 마음이 일어났다. 밖으로 내 보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지를 사용하려고 하다가 오늘따라 이상한 용기가 생겨서 손으로 직접 잡아보고 싶었다.



갑자기 날아든다거나 쏜다거나 무는 독성이 있는 벌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주저하기는 했지만 손바닥을 펴서 가까이로 가지고 갔다. 갑옷을 입은 듯이 단단하고 윤기가 도는 연두벌레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네 손가락을 접어 검지 손가락 하나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가서 벌레의 몸에 닿았다. E.T. 와 엘리엇이 검지 손가락을 맞닿아서 교감을 하는 듯 긴장감이 도는 터치였다. 나의 손가락 끝에 자극을 받은 벌레는 아기 머리카락처럼 가는 금빛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서 내 검지 손가락 첫마디로 살금살금 올라왔다. 무슨 일인지 그 징그럽던 벌레가 너무나 귀엽게 보였다. 그 순간,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두는 첫마디에서 두 번째 마디로, 세 번째 마디로 건너왔고, 나는 접었던 네 개의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 한가운데에 오도록 손을 오목하게 만들었다. 연두가 안전하게 손바닥 한가운데 들어왔을 때, 조심조심 걸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나무 아래 검은흙에 내려주었다. 연두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뒤집어졌고, 가는 금빛 다리들을 빠르게 바들거렸다. 또 내가 나서야 했다. 이제는 주저함이 없었다. 친구가 된 이상 내가 도와주어야 하니까.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서 연두를 집어서 바로 세워주자 머리를 내쪽으로 돌리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고 착각이 들만큼 정말로 잠깐 몸을 돌렸다.) 나무 둥치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내 안의 덩치 큰 겁쟁이가 물러나고, 용감한 어린아이가 깨어난 것 같았다.



또 다른 동시성이 연달아 일어났다.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님의 유튜브 채널, 아마존에 업로드된 영상에서 내가 오늘 겪은 벌레 사건과 비슷한 이야기를 보았다. 전갈을 징그러워하던 여학생이 전갈이 새끼를 낳아서 나타난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뀐 일화를 소개하면서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주제로 찍으신 영상이다.

최재천 교수님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어둡기 때문에, 무지하기 때문에,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라고 설명하시면서 알게 되면, '충분히 알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검은색 날개에 에메랄드 색 무늬가 새겨진 나비 보았다.

아침에 내가 나무 위로 돌려보내준 연두가 보낸 친구가 아닐까?

막 깨어난 용감한 어린아이는 이번에는 동화적인 상상의 나래를 폈다.



나비가 자신의 날개에 오렌을 태워서 연두에게 데려갔어.
에메랄드 나비와 연두와 오렌이 나뭇잎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었어.
산딸기 잼을 바른 나무 열매 빵에 도토리 차가 나왔어.
연두가 아침에 자기를 도와주어서 고마웠다고 인사를 했고,
오렌은 친구는 원래 그런 거라고 했어.




아이였을 때 민달팽이, 지렁이, 콩벌레, 메뚜기, 잠자리, 올챙이, 개구리까지 맨손으로 많이도 잡고 놀았는데, 몸집이 큰 어른이 되면서 그 작은 벌레들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되었을까? 감정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불신, 의심, 불쾌, 혐오, 억압... 부정적인 일체의 감정이 사물에 투사되어 모든 것이 나를 해칠 것 같고, 버릴 것 같고, 실패할 것 같고, 배신할 것 같은, 실망, 좌절, 불안, 겁, 두려움, 적대감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쓰게 된 것이다. 그 안경 때문에 하나의 세상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멀쩡한 집을 두고 새벽부터 책가방을 싸들고 카페에 가는 것도, 가장 소중한 가족, 가장 가까운 직장 동료가 미워지는 것도, 뭔가 늘 부족한 것 같고 더 해야 할 것 같은 결핍과 박탈감도 같은 맥락, 같은 이치다. 세상 모든 것은 나의 감정이 들러붙어 투영되어 보이는 환상인 것이다.



종이놀이 '인형의 집' 영상을 가지고 와서 어떤 글을 쓸까 생각을 하다가, 제목이 같은 헨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생각났고, 현모양처의 프레임 속에서 온전한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내이자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한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찾기 위해 가족과 집을 떠나는 줄거리가 생각이 났다. 집을 떠나는 이유가 그 공간에서 만들어진 불편한 감정 때문이라는 내용의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보라 벌레 꿈을 꾸고, 연두를 만나는 헤프닝을 겪으면서 벌레 감정까지 연결되었다.



종이 인형 놀이에 대한 글 치고는 너무 무거운 글이 되어버렸지만, '충분히 알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메시지는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희망적이지 않은가?

나를, 인간을,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P.S. 어딘가 또다른 장소에 출현한 연두를 보거든 죽이지 말고 밖으로 내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인형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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