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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Sep 12. 2024

당신이 만일 진정한 작가라면,

-<작가님 글도 좋아요> 19화. 류시화 작가님 <지구별 여행자> 중에서




오늘 <작가님 글도 좋아요>는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에 대해 영감을 준 많은 작가와 멘토들 중 가장 심장에 가까이 다가온 류시화 작가님의 글, 그중에서도 작가, 류시화를 혼내킨 힌두 문맹 꼬챙이 노인에 대한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학 졸업반 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 없이 공모전이나 학점 관리, 취업 준비 등등 날아드는 정보에 따라 우왕좌왕하다가 시간 벌기용으로 교육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시절, 읽고 곧바로 자퇴서를 제출하게 했던 인생 책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글, <작가 수업>을 필사하며 가을의 문턱에서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처음으로 인도 여행을 할 때 끈 달린 볼펜을 목에 걸고 다녔다. 눈에 보이는 풍경들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느낌들을 하나라도 더 적어 두기 위해서였다.



버스 지붕에 앉아 시골 마을을 여행하거나 시장통에서 한 무리의 성자들과 차파티(밀가루로 얇고 둥글게 만든 인도인들의 빵)를 나눠 먹으면서도, 일몰의 황혼 속에서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면서도 글감이 될 만한 것들을 열심히 수첩에 기록해 나갔다. 



어느 날이었다. 남인도행 카르나타카 특급열차 안에서, 한 힌두 노인이 내게 물었다. 

"실례지만 그것이 무엇이오?"

 영문을 몰라 쳐다보니, 그의 구부러진 손가락이 내 목에 걸린 볼펜을 가리키고 있었다. 글을 배운 적이 없는 시골 노인임에 분명했다. 



나는 친절하게 볼펜 뚜껑을 열어 보이며 설명했다.

"이건 글을 쓰는 볼펜이에요."

그러자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는 것이었다.

"왜 사람이 볼펜을 목에 걸고 다니는 거요?"



노인의 순진함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노인뿐 아니라 옆에 앉은 다른 승객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시 인도는 물자가 부족해서, 목에 거는 볼펜은 둘째치고 일반적인 필기구들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들에게 작가 수업을 시키듯 권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끊임없이 메모를 해야만 하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영감이 떠오른다 해도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니까요. 특히 이런 여행을 할 때는 훗날의 기록을 위해 많은 것들을 적어 놔야만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을 강조하기 위해 웃옷 주머니에서 스프링 달린 수첩을 꺼내 보였다.

"내가 언제나 볼펜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선 이렇게 늘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하죠."



나 스스로 생각해도 군더더기가 없는 설명이었다. 기차는 어느덧 북인도 대륙을 지나 현무암 지대인 데칸고원을 통과하고 있었다. 고원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사(봉우리가 평평하고 네모난 산)들이 대형 스크린처럼 차창 밖으로 하나둘 지나가고 있었다. 비탈진 언덕에서는 원색의 사리를 입은 여인이 검은 염소들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낡은 시골 버스가 형형색색의 인도인들을 가득 싣고 뒤뚱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들이 다 빠짐없이 수첩에 적어둬야만 할 것들이었다.



그때였다. 그 힌두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작가는 아니오만, 방금 당신이 한 말에는 동의할 수 없소."



내가 쳐다보자 노인은 꼬챙이처럼 마른 몸을 세우고 말했다.

"당신이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글로 써야 할 것이오."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당신이 진정으로 경험한 것이라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오. 그것들은 굳이 종이 위에 적어 놓을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신의 가슴속에 새겨지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재차 말했다.

"당신이 만일 진정한 작가라면, 종이 위에 적어 놓은 메모들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새겨진 경험들을 갖고 글을 써야만 할 것이오!"



듣고 보니 너무도 멋진 말이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그 말들을 수첩에 적어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수첩을 꺼내 들려는 찰나, 노인이 말했다.

"당신의 영혼 깊이 새겨진 진실한 경험이 아니라면 글로 쓸 가치도 없소. 머릿속에 한순간 스쳐 지나가고 마는, 그래서 금방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들을 갖고 글을 쓴다면, 그것이 어찌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소?"



세상의 왕들을 다 싣고 다니는 양, 기적 소리도 요란한 남인도행 카르나타카 특급열차! 목적지까지는 무려 마흔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도중에 연착할 것까지 계산하면 예순 시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마침 인도 달력으로 새해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이등칸 열차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고전 영화에나 등장함직한 양철 트렁크를 몇 개씩 이고 탄 남자도, 콧수염 기른 아저씨도, 난데없이 코브라 지팡이로 사람들을 찌르며 나타난 누더기 성자도,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져 옷핀으로 붙들어 맨 시청의 하급 관리도,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열심히 통역해 주고 있는 앞 좌석 청년도 묵묵히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인은 결론을 내리듯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쓰는 글을 다른 사람이 읽기 전에 맨 먼저 읽는 사람이 당신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당신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당신의 신이 맨 먼저 당신의 글을 읽는다는 것도. 당신이 쓰는 글은 당신의 영혼에 맨 먼저 새겨질 것이고, 신은 언제나 당신의 영혼 속에 새겨진 것들을 읽고 있기 때문이오."



나는 부끄러움에 슬며시 볼펜을 벗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 글을 신이 읽으리라는 것은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노인은 지금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쓰는 글들은 종이 위에 써지기 전에 내 영혼에 먼저 기록될 것이라고. 따라서 신이 영혼의 기록을 읽을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나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며,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고 많은 메모를 하라고 배워 왔다. 그런데 지금 이 문맹의 노인이 내게, 그보다는 먼저 가슴에 남는 진정한 경험을 하라고, 그런 다음 그 경험들을 글로 쓰라고 충고하고 있었다.



인도 여행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작가 수업이었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나는 인도로 갔지만 사실은 인도를 향해 떠난 것이 아니라 나의 이상향을 찾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내 혀에 맞는 음식, 내 코에 맞는 냄새, 내 귀에 어울리는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영혼을 울리는 대화, 그런 것들을 나는 찾고자 했을 것이다. 



10년 전, 카르나타카 특급 열차 안에서의 그 작가 수업은 내 작품의 방향과 글쓰기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굳이 수첩에 적어 놓을 필요가 없는 훌륭한 가르침이었다. 내 영혼 깊이 새겨져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지구별 여행자> 115-125쪽 '작가 수업' -류시화 |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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