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위대한 침묵 (Into Great Silence)
다큐멘터리 | 프랑스, 스위스, 독일
감독 필립 그로닝 | 168분
2005년 개봉(한국 2009년)
오늘 <삭의 시간>에서는 알프스 산속에 위치한 카르투시오 수도원 수도자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을 소개하려 한다. 이 영화는 특별한 제작 배경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세상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봉쇄 수도원을 촬영하고자 한 감독이 20년의 세월 동안 삼고초려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았고, 수도 생활에 피해가 되지 않도록 다른 스텝 없이 혼자 촬영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조명도 없이 자연광에 의존하며 촬영, 음향, 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을 감독 혼자서 해내며, 감독 자신이 수도사가 된 기분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제목 <위대한 침묵>이 암시하듯이 따로 허락된 시간 이외에는 어떠한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엄격한 침묵 속의 수도원은 장면의 대부분이 말없이 담겼다. 168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흡인력 있었던 것은 침묵 가운데 하느님과 대화하며 나아가는 이들의 충만함, 수도사들의 진지하고 맑은 눈빛, 소박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거룩함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젊은 수사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평생을 수도원에서 지낸 노 수사들이 침묵 속에서 기도와 노동의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오래 신어서 낡은 신발의 밑창을 고치느라 망치질에 여념이 없는 노수사, 고요한 공기 속에서 집중해서 재단하고 가위질을 하며 수도복을 짓는 수사, 야채를 씻고 다듬고 썰어서 공동체의 식사를 준비하는 수사들, 눈 길을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노 수사님이 눈 덮인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가꾸어 이듬해 봄, 파릇파릇 움트는 새싹을 키워내는 모습... 영화에 나오는 노 수사들은 침묵 속에서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 일을 한다. 침묵 속 그들의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보고 있으면 사물의 본질은 오직 침묵을 통해서만 드러남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하는 이들은 어느덧 한 분야의 장인이 되어있고, 기쁨으로 빛난다.
카르투시오 수도원 정문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쓰여있다.
세상은 돌지만 십자가는 우뚝하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세상의 소리 대신에 하느님과 대화하며 몸이 허락하는 한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동체를 위해 노동하는 수도자들의 맑고 순수한 눈빛에서 충만함과 거룩함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이 말만은 꼭 기억해라.', '이런 사람은 차단하라.', '반드시 해야 할 목록', '버킷리스트'... 눈만 뜨면 나를 위한답시며 쏟아지는 세상의 조언에 한 발짝 떨어져서 내 안의 우뚝한 십자가를 바라볼 시간이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막스 피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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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브런치북 <삭의 시간>은 침묵에 대한 내용이니만큼 댓글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해보는 것으로 침묵과 말에 대한 실제적인 차이를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