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의 시간> 23화.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사랑 속에는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더 많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 속에서 나왔다. 그 바다는 침묵이다. 아프로디테는 또한 달의 여신이기도 하다. 달은 그 금실의 그물을 지상으로 내려뜨려 밤의 침묵을 잡아 올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침묵을 증가시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 가운데에서는 침묵이 커져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다만 침묵이 귀에 들릴 수 있도록 이바지할 뿐이다. 말함으로써 침묵을 증가시키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현상들은 모두 침묵으로 먹고살며 침묵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다. 그런데 사랑만은 침묵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다.
연인들은 두 사람의 공모자, 침묵의 공모자들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연인에게 말할 때 그 연인은 그의 말보다는 침묵에 귀 기울인다. 그 연인은 "침묵하세요"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침묵해요. 내가 당신 말을 들을 수 있도록!"이라고.
침묵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 병존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에서 빠져나와 있다. 아무 일도 아직 생기지 않았으나, 모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미래에 있을 일이 이미 거기에 존재해 있고, 과거에 있었던 일은, 말하자면, 어떤 영원한 현재 속에 존재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정지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예견의 힘과 밝은 통찰력은 사랑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사랑 그 자체는 하나의 원초적 현상이며, 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원초적 현상의 세계, 말하자면 움직여지는 것보다는 현존재가 더, 설명보다는 상징이 더, 말보다는 침묵이 더 잘 통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랑의 수줍음은 원초성과 태초성의 수줍음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태초성으로부터 세속적 활동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을 꺼리는 수줍음이 있다.
한 인간이 사랑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변화는 그 원초적 현상이 인간을 하나의 새로운 시작 앞에 세워놓는 데에서 생기며,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얻는 힘은 사랑이 원초적 현상으로서 지니고 있는 힘으로부터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환히 빛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투명하다. 사랑의 원초적 형상이 그들의 얼굴을 통해서 환히 빛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떠 있는 듯하다. 원초적 형상 가까이에 있음으로써 생긴다.
한 사랑 속에 원초적 형상의 성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랑은 더욱더 굳건하고 지속적인 것이 된다.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안하다. 그것은 현상으로 실재화되기를 두려워하는 원초적 형상의 불안이다. 외부로 드러나면, 현상으로 나타나며 원초적 형상은 떨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초적 형상은 연상에, 실재화에 이르기를 동경한다. 그리고 사랑만큼 그렇게 감히 현상 속으로, 외부 세계 속으로 나타나려고 하는 원초적 형상은 없으며, 또한 어떠한 현상 속에서도 어떠한 현실태 속에서도 원초적 형상을 사랑 속에서만큼 분명하게 볼 수는 없다. 원초적 형상과 현상이 사랑 속에서처럼 그렇게 가까이 병존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랑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 사랑의 침묵의 충만함은 죽음의 침묵에까지 건너간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하나를 이루고 있다. 사랑 속에 있는 모든 생각과 행위는 침묵에 의해서 이미 죽음으로까지 뻗어 있다. 그러나 사랑의 기적은 죽음이 있을 수 있는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랑은 말할 때보다 침묵할 때 비할 데 없이 더 쉽다. 말을 찾는 것은 마음의 감동을 크게 해친다. 보다 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그 손실은 큰 것이다.
-브레몽의 <신비주의와 시> 중에서 인용된 아몽의 말
침묵할 때에 사랑하기가 훨씬 더 쉽다. 침묵하면서 사랑하기가 더 쉬운 것은 침묵 속에서는 사랑이 가장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침묵 속에서는 위험도 있다. 가장 멀리까지 이르는 그 공간은 감독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사랑에 적합하지 않은 것까지도.
사랑에 한계를 짓고 분명하게 해 주며, 사랑에게 사랑에 적합한 것만을 주는 것은 말이다. 사랑은 말을 통해서 구체화되며, 말을 통해서 진리 위에 서게 되며, 말을 통해서, 오직 말을 통해서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된다.
사랑은 단순한 하나의 샘물과 같다. 그 샘물이 둘레에서 꽃들이 자라나는 자갈 바닥을 뒤로하고 이제 하나하나의 물결과 함께 냇물로서 혹은 강물로서 자신의 성질과 모습을 변화시켜 가다가 마침내 가없는 대양 속으로 흘러든다. 그 대양은 미성숙한 정신을 가진 자에게는 참으로 단조로워 보이지만, 위대한 영혼은 그 해안에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다.
-발자크
사랑과 침묵 (107-111쪽)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 최승자 옮김
까치
침묵에 대한 오래고 깊은 관심으로 침묵에 대한 텍스트들을 찾아 읽어오면서, 오늘 필사한 이 대목, 사랑과 침묵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는 말보다 침묵이 많다는 문장이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런 심오한 말을 많이 들으면서 살아왔고,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바쁘고 시끄럽고 잠깐이라도 사운드가 비는 상황이 생기기라도 하면, 뭔가 멈춘듯해서 음악이라도 들어야 하는, 높은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실재하는 침묵의 사랑, 그 깊이에 도달하는 것만이 내 영혼이 원하는 궁극의 목표가 아닐까... 필사 중에 생각해 보았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 세상에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왔다."
에리카 선생님의 말씀을 여러 번 인용해서 글을 쓴 적이 있고, 자주 되새기고 있는데, 여기에 덧붙여 그 사랑은 침묵으로부터, 침묵을 통해, 침묵 안에서만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연재브런치북 <삭의 시간>은 침묵에 대한 내용이니만큼 댓글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해보는 것으로 침묵과 말에 대한 실제적인 차이를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