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라이너> 24화.
H는 학교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을 많이 배워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H는 성인이 될 무렵 시골을 떠나 도시로 왔다. 사회에 나와서 먹고 사는 데는 시골 서당에서 배웠던 공자왈 맹자왈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H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토큰도 팔고 복권도 파는 작은 구멍가게를 하면서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열심히 살았다. 가끔씩 조금만 덜 바쁘면 자신이 닦은 어렵고 귀한 학문을 정리해서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을 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마칠 때 즈음이면 토큰이나 복권을 사려는 손님이 들이닥쳤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나서 매일 조금의 시간을 할애해서 책을 쓴다면 이런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열두 권 정도의 전집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하루 종일 서서 장사를 한 H는 지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누구도 H의 학문적 소양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고 그것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지만 H자신은 지나치는 모든 손님들 중 자신만큼 한학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냈다.
H는 자신이 공부한 학문적 지식을 자식들에게 들려주며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랐지만 자식들은 고리타분한 말이라고 여기고 귓등으로 들었다. 그럴 때마다 H는 언젠가 자신이 멋진 책을 내기만 하면 자식들도, 손님들도 모두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고, 혼돈의 세상도 질서를 찾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일 년에 몇 번 쉬는 날이면 H는 그동안 쌓인 읽지 못한 신문을 읽었고, 쓰레기 수거장에 가서 사람들이 내다 버린 책이며 신문을 주워왔다. 그렇게 주워모는 헌책들과 신문들은 베란다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였고, 작은 마루 귀퉁이부터 쌓이기 시작해서 점점 공간을 차지하고 들어와 두 사람이 누울 자리 정도만 남겨놓고 점유했다. 그런 집에 자식들은 점차 오지 않았고, 급기야 H의 인생에 큰 사건이 일어난다. 쓰레기 같은 헌책들을 자꾸만 주워 모으는 남편을 평생 못마땅하게 여긴 H의 아내는 이런 질문을 한다.
"자식들보다, 나보다 책이 귀해요?"
H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만다.
"당연히 책이 더 귀하지."
아내는 집을 떠났고, H는 혼자 남겨졌다. 아니, 책들과 함께.
세월이 흘러 H는 요양병원에 있었다. H는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서 마실 것만 마시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언젠가 자신이 책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책만 쓰면 모든 것이 바뀔거라고 믿었다.
K는 살아보니 희망이란 것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희망도, 의미도, 보람도 무엇도 없다고 했다.
희망이 없다는 K는 새벽 5시 정각에 일어나서 미온수 반컵을 마시고 사과 반쪽을 먹고 5분 동안 맨손체조를 했다. 곧바로 걸어가면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분 정도 되는 동선으로 걸어서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다.
희망도, 의미도, 보람도 없는 K가 이토록 열심히 일과를 지키고 걷기에 열심히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이 거동하지 못하게 되어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봐서였다. K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보다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힘닿는데 까지 끝까지 돕고, 자식들에게 돌봄 요구를 하지 않는 죽음이었다.
K는 매일 새벽 같은 거리를 걸으며 그 거리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회상했다.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섰던 책방들, 멋쟁이 신사들로 줄을 이었던 양화점과 양복점들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면 아이들을 잃어버릴까 봐 긴장이 될 정도로 수많은 인파에 떠밀리며 축제분위기였던 이 거리의 쓸쓸함을 만끽했다.
K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미사를 다니고, 수요일 오전에는 미사가 끝나고 이어지는 기도모임에 참석했다. 그 기도모임에서 10년 근속 회원으로 본당 신부님께 표창장을 받았다. K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깨달음이란 것이 안 온다고 생각했다. K는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K는 호기심이 많았고, 궁금한 것은 즉시 찾아보고 배우고자 했다.
새벽 미사를 다녀온 K는 아침 식사를 하고, 노인 일자리를 다녀왔다. K는 노인 일자리 급여가 작년 27만원에서 올해 29만원으로 오른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날 해야 할 일이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 일에 착수했다. K는 마트에 가서 두유와 야채주스 같은 음료를 한 아름 사 왔다. 그것을 가지고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갈 참이었다. H가 있는 요양병원이었다. H는 K의 형이었다.